6. “이 책은 마가복음 1장 15절을 청년 청중과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언어로 풀어쓴 강해 설교서다.”(김회권)

15~16. 예수님을 가장 잘 기록한 문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남긴 네 권의 복음서가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급 정보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것인 마가복음입니다. 마태와 누가 두 사람은 이미 기록된 마가복음을 읽고 마가복음에 있는 많은 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약간씩 고쳐서 자신의 복음서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서로의 복음서를 읽은 흔적은 없습니다. 요한은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다 기록되고 한참 뒤에, 가장 늦게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두드러지지요. 요한도 마가복음을 읽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지상에 사셨던 때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인 굉장히 중요한 문서입니다. 이 마가복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바로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1장 15절(새번역)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34~36. 주전 150년경, 마카비우스 형제가 시리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마카비우스 형제의 게릴라전으로 시리아의 용맹한 장군들이 있는 대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여깁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을 탈환해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수전절’(하누카)이라는 절기가 생겼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부림절과 이 수전절을 세 개의 중요한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나라도 곧 다시 시리아에 무너지고, 주전 63년이 되면 패권이 또 바뀌어서 로마가 시리아를 정복합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로마의 권력자가 바뀌면서 이스라엘 역사도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 지리멸렬한 역사 속에서 헤롯 대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대왕은 친로마주의자로, 강대국을 등에 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함께 얽혀 들어갑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헤롯 대왕은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한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지하던 사람이 아니라 그 경쟁자가 황제에 오른 상황이 되자 그는 로마까지 찾아갑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앞에서 왕관을 내려놓고 “소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왕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속국의 왕이 로마까지 찾아와서 왕관을 내놓으며 잘못했다고 하는 데 감동한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에게 염려 말고 돌아가라며 다시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로마주의자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대통령만 되면 자꾸 미국에 가는 걸 볼 때마다 헤롯 대왕이 떠오릅니다. 로마 황제의 인가를 받고 돌아온 헤롯은 권력기관을 마련하고 피의 숙청을 시작합니다. 아내, 장모, 동서, 다른 왕족,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모든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고혈을 짜서 건축과 토목 사업을 일으킵니다. 황제 신상과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등 로마식 건축물들을 세우고 빌립보 같은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볼 수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헤롯 대왕이 만든 것입니다. 잔인한 헤롯 대왕은 주전 4년,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때쯤 여리고에서 죽임을 당하고, 유대 영토는 헤롯의 세 아들인 아켈라오와 빌립과 안디바가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갔습니다. 그나마 있던 나라는 세 개로 쪼개지고, 로마에 붙은 권력자들은 돈을 벌고, 종교 지도자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자기 배만 불리고, 가난한 민중은 더욱 가난에 찌들어갔습니다. 암울하기 그지없던 그 때,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49~50. 내가 아는 놀라우신 내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주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하며 바보가 될 때, 내가 성장합니다. 열심히 성경공부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공부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바를 세속 생활에서 표현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92~93. 1974년,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 군인이 발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22살의 젊은 장교였던 그는 필리핀의 루방 섬에 파견되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그의 수하에 있던 모든 부하가 투항했지만 그는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 숨어 지내는 동안 그는 민간인과 필리핀 정찰대를 자그만치 30여 명이나 살해했습니다. 패전을 알리는 여러 전단과 통로를 접했지만 그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드디어 그의 직속상관이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투항 명령서를 건넸습니다. 그 투항 명령서를 받고서야 그는 29년 만에 루방 섬에서 나왔습니다.

96. 헬라어 원문의 “가까이 왔다”는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단어입니다. … 이 단어는 ‘엥기조’(engizo)라는 헬라어 단어의 현재완료형입니다. 여기서도 문법이 중요합니다. ‘엥기조’는 ‘가깝다, 가까이 오다, 가까워지다’라는 단어인데 현재완료로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일까요, 아주 가까이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97.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지금 곧 임하였다’는 뜻과 ‘이제 곧 임할 것이다’라는 두 개념이 공존합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103.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이중구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할 때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보았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106~107.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구조로 인한 종말론적 시간관이 그의 신학에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대가 흘러오다가 하나님이 개입하신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이 구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면서 두툼한 성경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담대하게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자 이 교수님이 씩 웃으며 답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그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과 미래에 완성될 구원 사이에서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구원 부분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를 보는 역사의식이자, 시대를 보는 눈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벽한 구원은 남아 있고, 우리의 구원은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111.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대부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계속 무시하면 어느 단계부터는 우리 안의 성령님이 침묵하십니다. 불이 꺼지듯이 성령이 소멸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얘기했습니다(살전 5:19). 중간 시대인 지금은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품이 변화되는 성령의 열매,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령의 비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결국 성령님이 근심하시다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112. 교회와 성령, 이 둘은 중간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함께 속해서 같이 살아갈 공동체인 교회와, 우리를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142. 예수님의 주 관심사는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내 주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그런 나에 대한 관심에서 예수님의 관심으로 눈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151. “아, 그거 말입니까? 사실은 나도 그냥 한번 흉내 내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내가 잘못한 죄를 대신 뒤집어쓰셨 거든요.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이 잘못한 걸 내가 뒤집어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래서 그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일도 잘하고 성실한데 이번에 크게 실수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놔두면 당신이 파면당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뒤집어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52. 회개는 울고불고 슬퍼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서 우릴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깊이 묵상하면서 내 중심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수련회에 참석하고 수없이 많은 기도회에 가서 울었지만 변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셨다면, 우리의 변화는 감정적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중에 중요한 것이 예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우리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153~154. 저는 16장 8절에서 끝나는 것이 원래의 마가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뒷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16장 8절 이후가 없습니다. 9~20절 내용이 길든 짧든 붙어 있는 사본은 모두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학자가 마가복음 원본에는 16장 8절까지만 있었으리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 25~3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56.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존경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회개해야 할 영역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내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늘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 되셔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세 번째 회개입니다.

156~157. 나에게는 어떤 회개가 필요합니까? 첫째, 나에게 꽂혀 있던 나의 주 관심이 예수님의 관심으로 바뀌는 회개입니다. 둘째, 세상 방식대로 맺었던 인간관계를 예수님의 방식으로 새롭게 맺는 회개입니다. 셋째, 참으로 매력적이고 존경할 만한 예수님이지만 단순히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며 또는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분을 예배하는 자로, 경배하는 자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생활해 나가면서 삶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됩니다.

200.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201. 믿음은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믿는 것입니다.

208.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223. 교회가 지원해 주지 않아 2년 정도 지나면서 청년부는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저는 껍데기밖에 없는 교회에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선교단체 간사가 되어서 5년간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사역하고 나니까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캠퍼스에서 4년 동안 한 사람을 변화시켜봤자 졸업하고 나가면 너무 많이 넘어지고 살아남는 사람은 얼마 없었던 것입니다. 선교단체는 지역 교회가 아니니까 졸업한 사람들을 지역 교회로 보내야 하는데, 보내면 다 죽어버렸습니다. 고민이었습니다. 지역 교회에 절망했고, 학생 운동의 한계를 봤으니까요. 그렇게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224~225. 예수님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과 놀라운 비전과 앞으로 펼쳐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침에 일어나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예수님이 최우선 순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229. 하나님을 조작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로 조작당하지 않으십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232. 그 옛날에 돌을 자를 때는, 돌의 결을 따라 한 치 깊이의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마른 참나무 못을 박았습니다. 그 위에 물을 부으면 참나무 못이 팽창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바위가 쩍 갈라집니다. …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_ 김형국, <청년아 때가 찼다>, 죠이선교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