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드 버드, <어느 방탕한 사역자의 노트>, 그리심, 2019.

36. 후회하는 의식들에는 “나”만이 사방에 퍼져 있다. 나는 이것을 하리라, 저것을 하리라, 나는 다시 괜찮아지리라. 이러한 예배의식은 예배하는 자와 예배 받는 자가 모두 동일하다. 바로 자기 자신(ego)이다.

38~39. 나는 꾸준히 자기창조 상태로 삶을 살았다. … 내 마음 속에는 애써 이루고자 하는 한 형상이 있었다.

43. 나는 나의 자기창조에 무관심해져 갔다. 이것이 우리를 무로 만드는 죽음이다. 우리가 자기창조에 들인 모든 수고가 없어지면서, 하니님은 이제 무가 되어버린 우리로부터 창조하시는 그의 일을 계속 해 나가실 수 있다.

80.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는 우리가 적절하고 성실한 회개를 입증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보다 선행하며, 회개를 끌어낸다.

98~99.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아로 넘치는 망쳐 놓은 이야기를 가지고 가서 그것을 예수로 채우신다. “내 아들은 이제 현재의 너애. 예수는 너의 이야기이고, 너의 정체고, 너의 모든 거야”라고 말씀하신다. … 그는 과거의 우리가 되셨고, 우리는 현재의 그가 된다.

117~118. 나는, 자유는 내가 나 아닌 어떤 사람인 체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나를 용납하는 어떤 이의 애정 어린 환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짓 가면을 그 자신의 진짜 얼굴로 바꾸신다.

128~129. “당신이 충분히 참회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기쁨을 듣는 데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루터는 말한다. … “참회가 가장 높고 가장 완벽할지라도, 공의의 관점에서는 매우 작은 것이다. 그것은 뭔가를 받을 만하거나 만족을 줄 만한 것이 전혀 아니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우리는 관심을 우리 자신 - 우리 슬픔, 우리 후회, 우리 고백, 우리 회개 - 에게서 돌려 우리 귀를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의 목소리에만 맞춰야 한다. … 완벽한 회개를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가 아니라, 우리에게로 되돌아오게 한다.

130~131. 우리가 회개한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신다. …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로마서 2장 4절)

147. 나의 끈질긴 반역의 모든 세월이 지나자, 용서하시는 구주 주위에 동료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로 하나님은 나를 다시 데려오셨다. 내 영혼의 흉터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렇다고, 좋아 보이라고 우리를 모으신 게 아니다. 교회는 아픈 이들, 부상당한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치유하는 안식처이다. 여기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156~157. 우리 모두는 우리가 씨름하게 될 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고 싶어한다. 내 삶은 언제 다시 본 궤도를 달릴까? 나는 언제 회복될까? 고통과 후회는 언제 사라질까? 시편 기자의 가장 빈번한 질문이 “주여, 어느 때까지요?”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답은 언제나 똑같다. 그 날이 동틀 때까지. 주께서 새벽이 들어오게 한 그 시간까지. 주께서 자신과 우리를 위해 - 우리가 볼 수 없고, 빈번히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 어둠을 다 이용하실 때까지.

163. 자초했든 아니든, 어떤 고난을 견뎌냈든, 그 고난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임무로서 부여하신 흉터이다. … 우리 흉터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흉터는 예수께서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시려 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상하게 하는 능력과 치유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미래로 나아가게 하시려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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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의 죽음, 말씀으로 각인된 무의식의 회개 —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체화된
고난의 목적. 자기 부인, 즉 십자가의 성육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