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보수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는 자칭 진보세력일테고, 회개하여 천국이 가까웠음을 깨우쳐야 할 대상은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선, 진보세력은 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가. 진보는 보수와 동일하게 인권을 기반으로 하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모든 억압을 거부하고 사회적 규제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구현한다는 명목 하에 낙태와 동성연애 등의 비윤리적(비성서적) 욕망마저 정당화하고자 한다. 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범주로 귀속시킬 수 없다. 교회는 [약자 및 소수자와 연대하여 강자의 기득권과 그에 기생하여 형성된 지배적 가치를 전복하는] 급진적 진보성향을 내포하는 동시에 [성서의 무오류성에 근거하여 윤리 기준을 강제하는] 고루한 보수성향 또한 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세력은 교회의 보수성을 비판할 개념적 층위를 확보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비판대상인 교회는 실재하는가. 교회는 예수를 좇는 이들(Christian)의 회합으로서, 머리되신 예수의 몸을 이룬다(엡 1:23, 5:23). 이에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예수의 정신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정신은 다음과 같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교회의 실재성은 신도들의 마음과 행실에 의거한다. 만약 신도들이 섬김의 수여가 아닌 수혜를 위해 교회를 찾는다면, 교회의 실재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소멸한다. 반면, 교회의 표상은 신도들이 예배자에서 소비자로 변질됨에 따라 동일한 비용(헌금)으로 양질의 혜택(은혜; ’spiritual awakening’이 아닌 ’mental well-being’)을 받고자 갈망하기에, 중소교회는 고사하고 대교회는 팽창한다. 따라서 비판대상으로서의 교회는 그 본질(Chritianity)을 상실한, 교회(church for worship service) 아닌 교회(church for customer service)로 잔존하기에 비판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물론, 기의를 상실한 기표 운운하며 비판을 회피하는 자세는 용납할 수 없다. 다만, 허상의 교회에 비판을 가하며 -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리는 식으로 - 실재의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 역시 수용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