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 심연에서 나의, 시스템의, 세계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바라보겠지만(니체), 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14쪽).” “그것은 어딘가 제 안의 심연을 대면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의 목소리처럼” 들릴 것이다(15쪽).

2.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그 치열함이 시인의 시적 발화를 독려한다.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소설가들은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긴다. 그것이 소설가의 서사 구성을 추동한다. 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업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 말하자면 나의 진실에 부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건이다(14쪽).”

3.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22세기가 온다 해도 비평가는 실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믿지 않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실업의 불안 때문이 아닐 것이다(16쪽).”

4. “가라타니가 전하는 바대로라면 한국의 비평가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학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 … 가라타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마치 1950년대 미국에서, 1980년대 일본에서, 1990년대의 한국에서, 갑자기 모든 문학이 일체히 윤리와 무관해지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듯 말한다. 윤리가 정치의 하위 범주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17쪽).”

5. “그러나 미시 층위에서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햄릿> 4막 4장) 일을 늘 해왔다. 문학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정치를 보족하는 윤리가 아니라 정치를 창안하는 윤리를 말해야 한다. …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대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어떤 ‘부분’이 괴사(壞死)한 것이다.” “이 기형은 총체성의 파편이 아니라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일 것이다(18쪽).”

6.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 … 발화의 종말과 행위의 파국에서 시와 소설은 시작된다. 그대 자신의 말을, 그대 자신의 행위를 하라. 이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라 부를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다. 몰락의 에티카다(19쪽).”

7.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Ethica)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이 이런 것이라서 그토록 아껴왔거니와, 시정의 의론(議論)들이 아무리 흉흉해도 나는 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