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독재의 반대개념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사실상 역사적 파격이다. 그 이전 시기에 독재-민주주의라는 적대적 개념쌍은 대단히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의 반대는 오히려 정상적인 헌정체제였고[ * 로마 공화정 당시 비상사태의 경우, 집정관 중 한 명에게 한정된 기간 동안 무한한 권력을 부여했는데 그를 가리켜 ‘황제’를 뜻하기도 하는 imperator 즉, ‘독재관’이라 칭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군주정 혹은 귀족정이었다. 민주주의-독재라는 적대적 개념쌍이 역전불가능하게 결합된 때는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 두 개념의 적대적 관계는 추축국에 적대적 전선이 구성되면서 비로소 수립되었다. … 이러한 담론의 질서로부터 소련 역시 벗어날 수 없었음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개념 대신 인민 민주주의 개념을 선호한 것에서 드러난다(참고 : 아테네와 스파르타).” 

2. “그[임지현]는 대중이 순진무구하게 (독재)권력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대중은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권력에 동의 혹은 공모하는 존재였다고 주장한다. 즉, 독재는 대중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대중에 의거한[기반을 둔] 독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을 억압하는 독재와 대중에 의거하는 민주주의라는 기존의 도식은 무너진다. … 그로써 우리는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이 독재와 공모한 지점을 사유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민주주의가 현재 억압하고 있는 지점들을 성찰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임지현]는 근본적으로 구조주의적이다. 그는 “국가가 각 개인을 국민, 민족 혹은 계급으로 호명하고 개개인이 그 부름에 자발적으로 응할 때, 이들은 이미 국가의 지배장치 안에 포섭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 임지현의 입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대중이라기 보다는 대중을 호명하는 권력이다. 임지현의 입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재의 메커니즘을 적절하게 사유하고 독재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작동하고 있는 억압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권력의 전능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권력의 주체화 메커니즘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한편으로는 권력이란 상징체계의 한 가운데 난 ‘구멍’을 사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화에 의해 포섭되지 못하는 주체의 어떤 지점을 탐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민주-독재의 개념쌍에 포착되지 않는 지점, 인간에게 부과되는 권력의 논리에 대하여 저항을 개시할 수 있는 지점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4. “바이에른 지방 노동자들의 일상을 분석한 이안 커쇼의 결론이 지극히 온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힘을 인식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간 길은 저항이 아니었으며, ‘상황을 변경시킬 수 없고’ 또한 ‘그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고 믿었던 그들은 ‘타조처럼’ ‘자기 자신’과 ‘생존’에만 몰두한 채 ‘미래에 대한 생각을 배제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망명 사민당 역시 이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나치즘의 성공’은 ‘노동계급의 원자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만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는 자르 지역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총괄하면서, 1935년 이후 나치 일상의 특징은 ‘사회적 지각과 사회적 행위를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으로 제한시키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경향은 전쟁으로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징집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나, 공장도시에 집중적으로 투하되던 폭격의 상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터와 가족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쟁 말기 노동자들은 포이케르트가 정식화한 대로, ‘여위고 고립된 채 사회적 관련 및 의미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중심으로 후퇴’해버렸고, 그렇기에 그들은 그때 다만 ‘그저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버리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상의 원자화 현상을 ‘구조적’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목적론적 독해이거나 메타 역사적 독해다. 일상의 파편화는, 나치즘과 노동자가 일정하게 작용 및 반작용하는 가운데 나치 및 노동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 일상의 원자화와 사회적 무관심이 결과적으로는 나치 권력을 안전하게 유지해주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현상은 나치 권력의 한계가 명료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 여기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티모시 메이슨의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치의 군수정책이 노동전선의 뜻밖의 노조화와 임금인상을 향한 노동자 개개인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적으로 방해받았기에, 나치의 전쟁 수행은 결국 독일 노동자들에 의해 이미 전복된 것이었고, 따라서 나치 시대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저항’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해석은 과장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노동대중에 대한 나치 권력의 주체화 작업이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음 나타내주는 것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총괄하면 그렇다. 나치적 우주는 구멍난 것이었고, 그 균열점을 아래의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며, 그렇듯 체제를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전유하자 나치의 정책은 기획과는 대단히 다른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나치의 세계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의 세계였으며, 그 교차로에서 나치는 내적 모순에 이끌려 과격화되”었다.

5. 나치의 과격화는 히틀러가 드디어 전쟁에 고착된 탓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이제 정상화되고 화석화된듯이 보이던 독일의 현실, 즉 독일인들이 이제는 심드렁해 하고 있는 나치 독일의 현실을 나치 지도부가 견디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중략) 1938년 11월 9일, 파리 주재 외교관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괴벨스의 주도로 온갖 나치 조직들이 가담하여 전국의 유대인 성당과 점포를 불태우고 파괴한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은 구역질과 격분이었다. 파괴와 폭력과 재산 손실이 만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정적 반응의 이면에는 합법적인 조치는 상관없다는 감정이 깔려 있었다. … 제국수정의 밤에 대한 부정적 반응에 놀란 나치가 화끈하지만 인기 없는 길거리 폭력 대신, 조용하지만 극히 효율적인 법적 접근을 택하자 독일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급속히 잃어버린다. 유대인들이 자기 점포를 턱없이 싼 값에 판매하도록 강요당하고, 공공장소 출입이 금지되고, 일상에서 유대인 표식을 달아야 했지만, 그것은 독일인들의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제국수정의 밤 이후 망명하는 유대인이 급증하고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다. 또한 ‘유대인의 집’이라 칭해지던 곳으로 거주가 제한된다. 따라서 독일인들의 일상에서 유대인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대학살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정작 ”보이지는 않고 관심은 없는데 나치의 선전은 무성하므로 [독일인에게] 유대인은 탈개인화된다. 남는 것은 오로지 추상성이다. …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 그리하여 커쇼는 유대인 정책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을 둔탁한 무감동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수용으로 총괄한다. (중략)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혹은 부분적인 사실이 인지되어도, 전모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그것은 우리가 노동자의 일상을 분석한 끝에 도착한 면모, ”여위고 고립된 채 사회적 관련 및 의미연관으로 벗어나”.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자신의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고 ‘나와 가족과 일터’에만 집중하는 인간, 그 원자화된 개인이 유대인 정책에 투영된 모습이다.”

6.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바이마르 독일은 19세기 말의 문제가 심화된 상태에서 정치, 문화, 사회, 대외관계에서 새로운 난점들이 추가된 사회였다. 그리고 나치즘은 그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겠다는 종말론적 정치종교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유토피아적이기만 하였으니, 부르주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무계급사회를 꿈꾸고, 공업기술에 환호하면서도 낭만적 농촌을 그리워하며, 인종을 새로운 사회의 조직원리로 내세웠지만 그 과학적 개념은 실상 신비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구체적인 강령이 반자본주의와 반사회주의, 반자유주의와 반보수주의 등으로 부정적인 동시에 모순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순은 오직 반유대주의에 의하여 지탱될 수 있었고, 그 공허한 내용은 대제국의 꿈에 의해 채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대제국의 비전 역시, 전자는 부정적이고 후자는 몽상적인 것이었기에 양자는 서로를 지시함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중략) 서양 역사에서 반유대주의는 언제나 주체의 내부 문제의 투사였고, 가공의 유대인 상은 서구적 주체 자신의 균열을 은폐하고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가시적인 사회적 구분이 없어지고 끝내 유대인이 해방되는 18~19세기, 산업화와 그에 따른 사회문제가 폭발하는 그 시기에, 중세로부터 상속받은 ‘개념적 유대인’이 주체화의 결정적 수단이 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독일의 경우 그 과정은 격렬했다. 민족국가 수립의 뒤늦음과 엉성함, 위태롭게 표상되던 국제정치적 환경, 늦었지만 빨랐던 산업화가 미친 충격 등, 1차 세계대전과 패전을 통해 더욱 심화된 그 모든 문제는 독일에 반유대주의와 대제국이라는 상호지시적인 기표를 중핵으로 삼은 나치즘이라는 정치종교를 탄생시켰고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중핵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서, 실천에 부쳐지자 문제에 문제만을 야기하였으며, 결국은 허무주의적인 파괴와 자멸만을 낳았다. 그 모든 일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은 무관심으로 요약될 수 있는 바, 이는 한편으로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기능을 발휘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유대주의를 통한 나치의 주체화 작업의 한계를 지시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독일인들은 그 중차대한 일을 자기 개인의 일에 태연하게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대중을 국민으로 주체화하는 [괴뢰]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대중의 원자화’는 게슈타포의 감시와 통제가 아닌 - 게슈타포의 수사 실적은 대부분 사적 원한을 앙갚음 하려는 밀고에 의해 이뤄졌다 -  나치 집권 이전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물적토대에 의거한다. 대중 동원은 입안자의 의도와 달리 대부분 “순전히 웅성거리기만 하는 모임”으로 전락했고, 개별 복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시엔 가급적 불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나치즘이 “A이면서 not A”인 이유는 체제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은폐했기 때문이며, 은폐된 구조적 위기는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됐다: 위기부담의 내적전가(반유대주의)와 외적투사(제국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