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도의 자세

“우리는 그 동안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무엇을 얻어내는 수단으로만 생각했지, 자신의 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청구용 기도와 성화의 작용에 효능이 있는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말할 때, 죄를 죽이는 그 효과는 기도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에 쏟아 붓는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거하는 자리가 입술이라면 거룩한 기도 제목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제목들을 들으면서 죄가 죽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자리는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비록 기도의 내용이 세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열렬히 기도하면 그러한 실천을 통하여 죄는 죽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죄는 마음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며 우리의 중심을 정직하게 쏟아놓을 때,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비로소 죽습니다.” “따라서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은 죄를 전혀 위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예 기도 생활을 안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거하기 좋은 환경을 죄에게 제공합니다. … 터널식 세차기에서 세차를 할 때면, 우리는 차 위로는 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지지만 차 안에는 한 방울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 마음 자체를 쇄신시키는 어떤 변화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김남준, 2004: 24~27)

2. 설교의 퇴락

“복음에 대해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관심사가 실제적인 것들로 향합니다. 요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실제적인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을 하지!’ 그러나 복음 안에서 복음을 토대로 한 실제적인 것은 좋지만 복음에 싫증이 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설교 강단에서 울려 퍼져야 할 메시지가 아니라 회관에서 울려 퍼질 강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 18세기 이후로부터 20세기까지 유럽의 교회들이 급속하게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라고 설교자가 외치면 사람들은 ‘누가 아니라 그랬나요? 우리 모두 그 말에 동의합니다. 다 아는 얘기하지 마시고 실제적인 것을 좀 얘기해 달란 말입니다!’라며 대꾸했습니다. … 그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저 지적인 동의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요구에 반응한 설교단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주일날 설교된 설교 제목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유익’,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예방 주사의 중요성’, ‘양들을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놓아 기르는 것이 좋다’, 이 모든 것들이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설교들이 강단을 물들이는 동안 교회는 하나둘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김남준, 2010: 148~149)

* 세속의 도전에 대한 신앙의 응전이 바로 기도요, 설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