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에서 승리하여 일본에 진주한 미국 점령군은 일본제국대학의 교육 수준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아직도 학문적으로 영국이나 독일의 대학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미국인들로서는 일본제국대학의 시설과 교수와 학생의 수준이 그에 못지않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사립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오대학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 스스로도 엄청난 ‘엘리트’였거니와, 그의 저서 <문명론의 개략>을 읽게 되면 어떻게 칼 차고 머리 묶고 자란 사무라이 청년이 서양 문명의 정수를 이토록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는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그가 일본 제국의 장래를 맡을 뜻있는 젊은이를 키울 의숙(義塾)으로 시작한 것이 게이오대학이니까. 어째서 그랬을까. 메이지 유신 이래 급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의 지배층이 목표로 했던 것은 서양 열강과 견줄 수 있는 독자적인 국가 건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키워 내려 했던 ‘엘리트’는 단순히 말 잘 듣고 시험 잘 보는 학생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 전략이나 국가의 사상적 기초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관점을 가지고서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이 왔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 그야말로 ‘실력 있는’ 학자와 관료와 기술자들을 키워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치안법’이 시퍼렇던 기간에도 제국대학 내에서는 거의 완전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학생들과 교수들은 마르크스나 좌파 사상도 얼마든지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 서울대학교는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거니와, 학창 시절 도서관에 갈 때마다 경성제대 시절의 장서 목록과 서울대학 시절의 장서 목록이 그 질과 양에서 얼마나 격차가 나는가를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_ 홍기빈(2010). ‘엘리트 교육의 허와 실’, <교육 통념 깨기>, 167~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