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엥겔스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는 사회-문화 르포르타주를 만들어냈다. 빈민의 본질이 무엇이고,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존재가 공장주의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그럴듯한 사회이론을 늘어놓는 식이 아니었다. … 맨체스터로 가는 길에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만나게 된다. 베를린이 강의실과 술집에서의 토론으로 점철된 정신의 도시였다면, 맨체스터는 물질의 도시였다. 딘스게이트와 그레이트 두시 스트리트를 걸으면서, 샐퍼드 빈민가와 옥스프드 로드 주변 슬럼을 드나들면서 엥겔스는 산업화된 영국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실들, 사실들, 사실들을 철저히 수집했고, 그 효과는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맨체스터에 대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이 사실은 엥겔스가 섬뜩한 필치로 남긴 기록이다. 겨우 24세의 나이에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는 20세기 들어서 산업화 시대 유럽 도시의 끔찍한 상황과 착취, 계급 갈등을 문학적으로 그려낸 소품으로 여겨지곤 한다. 엥겔스의 기여는 단순한 사실 제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가 공산주의 이론의 선구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 그는 산업화되는 맨체스터에서 인간들이 겪는 불의를 직접 목격하면서 베를린 시절의 단순한 추상적 지식을 넘어섰다. 24세의 엥겔스는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지성으로 청년 헤겔파의 소외 개념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물질적 현실에 적용시켰으며, 이를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의 골조를 만들어냈다. …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는 이후 30년 동안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 엥겔스가 쓴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다.”

2. “대중 정치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이나 결국은 실패한 제1인터내셔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880년대에 엥겔스가 쓴 수많은 팸플릿과 선전물로 시작된다. 엥겔스가 고인이 된 동료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마르크스주의를 인류사에서 가장 설득력있고 강력한 정치철학 가운데 하나로 발전시킨 것이다. … 장군이라는 별명은 엥겔스의 군사적 통찰력 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인내와 절제, 놀라운 자제력과 헌신, 전략적인 감각, 특히 자신과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태도를 한데 아우른 표현이었다. 세월이 가고 마르크스의 기력이 쇠하면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엥겔스의 강철같은 의지와 헌신은 장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더더욱 강해졌다.”

3. “아닌게 아니라 낭만주의적 애국주의는 청소년기 엥겔스에게 처음으로 지적 자극을 준 사조였다. 후일 엥겔스는 따분하고 기계론적인 마르크스주의자 -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계몽주의 사상의 환원주의적 파생물이라는 식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 라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물론 매우 부당한 평가다. 엥겔스는 평생 이런 젊음 넘치는 문화적 애국주의를 저버린 적이 한번도 없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를 주창하고 조국에서 추방당했을 때도 지그프리트와 그가 대변하는 영웅적 운명의 세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 친구가 묻힌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묘석을 세우거나 가족 묘지를 꾸미지도 않았고, 공식 행사도 없었다.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매혹적인 삶을 살았고, 평생을 무한한 희생으로 일관한 인간 엥겔스는 그렇게 갔다.”

* 선생님께서 ‘엥겔스’로 돌아오셨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