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가 김영하는 지난 1월 1일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될까>라는 신춘문예에 대한 단상에서 “누군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긍지”라고 했고, 이에 대해 평론가 조영일은 “외부의 인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만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른다”며 반박했다. 김영하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 뿐”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 내면의 열정”이라고 강조했으나, 조영일은 “자신만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재반박했다.

2. “논쟁의 파탄은 다 제 책임”이다. “블로그를 닫고 트위터를 그만두겠다. 이제 가장 사랑하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 글만 쓸까 한다. 부족한 저는 골방에서 저의 미성숙한 자아와 어두운 욕망을 돌보겠다.” “무엇보다도 죽은 고은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다. 게다가 우울증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진실은 외면한 채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우리 사회가 서로 살피고 돌보는 계기가 되면 그녀의 죽음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알바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양 극단”이다.(김영하)
 
3. “생산적인 논쟁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이 짧았다.” “열심히 소통하려고 노력했는데 독자가 작가에게 원하는 소통은 이런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설령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제가 가장 잘 쓰고 독자들이 가장 기다리는 소설을 통해 쓰는 게 맞다.” “그만두게 됐지만 논쟁 자체는 유의미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 시작하는 예술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예술가 개인이 냉철하게 현실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고, 조영일 씨는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 다 중요한 논점이었다고 생각하며 다른 분들이 생산적인 결론을 내주셨으면 한다.”(김영하)

4. 해묵은 논쟁이, 故 최고은을 향한 대중의 편의적 감정이입으로 달궈졌다. 조영일의 기여는 번역 뿐인가.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에 젖어 있으면서도, 그는 선생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사회를 개혁한 경험이 있는가. 무언가 변혁하려는 자는 어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 뿐”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 내면의 열정”이 아닌가. 조영일에게 킹(Ross King)의 <파리의 심판>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