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과학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기술과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의 군사 연구를 기획했던 버니바 부시 Vannevar Bush의 저서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1945)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고, 이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와 같은 20세기 전반의 과학철학은 보편적 경험과 논리에 바탕한 자연과학이 보편적, 객관적, 합리적이라고 간주했다.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서로 다른 자연과학의 단일성 unity을 믿었고, 궁극적으로 모든 자연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과학의 발전은 논리적이고 누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실증주의는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겪으면서 파기되었다. 특히 과학사에 근거한 토머스 쿤 Thomas Kuhn의 <과학 혁명의 구조>(1962)는 과학의 발전이 논리적이고 누적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에 일침을 가했다. … 1970년대 후반부터 사회구성주의 social constructionism가 과학을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 사회구성주의는 과학 지식의 형성 과정에 사회적 이해 관계가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함으로써, 합리적인 과학과 그렇지 않은 다른 믿음 사이의 경계를 한층 더 불분명한 것으로 만들었다. … 사회구성주의가 발흥하던 1980년대에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실천 scientific practice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방법론은 추상적인 세계관이나 수리적인 과학 이론보다 과학자들의 실험, 실험실, 기기, 데이터의 생성 등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 1990년대에는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 사회구성주의자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이는 ‘과학 전쟁 Science Wars’과 ‘소칼의 날조 Sokal’s Hoax’ 사건으로 커지면서 구미 지성계를 뜨겁게 달구었다.”(6~8)

1. “쿤의 과학혁명과 패러다임 같은 개념, 관찰의 이론 의존성과 과소결정 이론, 그리고 ‘내외 논쟁’은 1970년대 중엽 스트롱 프로그램 같은 사회구성주의가 이론적으로 정립되는 지적 배경을 형성했다. … 데이비드 블루어는 향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그의 저서 <지식과 사회적 이미지 Knowledge and Social Imagery>(1976)에서 이런 세 가지 흐름을 통합해냈다. 이 책에서 블루어는 ‘스트롱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프로그램의 네 가지 명제를 제안했다. 그 명제란 인과성causality, 공평성impartiality, 대칭symmetry, 반성reflexivity을 말한다.”(27)

2. “스트롱 프로그램에 따르면 과학논쟁은 ‘블랙 박스’를 열어서 우리에게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과학 science-in-the-making’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유명한 사회구성주의자인 해리 콜린스 Harry Collins는 스트롱 프로그램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을 연구하는 세 가지 단계를 설명했다. 첫 단계는 과학 논쟁의 분석을 통해 과학의 ‘해석적 유연성 interpretative flexibility’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즉 과학이 아직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상태를 발견,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는, 연구자는 해석적 유연성을 제한하고 그럼으로써 논쟁을 종결짓는 기제 mechanism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이러한 기제와 좀더 넓은 사회 구조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에서의 유연성을 찾고(블랙 박스를 열고), 유연성을 종결짓는 기제를 찾고, 이러한 기제 배후에 있는 사회적 요인을 찾는 것이 콜린스가 제안한 사회구성주의의 프로그램의 경험론적 원칙이다. … 콜린스의 의문은 왜 무한 회귀가 일어나지 않는가, 즉 무엇이 이렇게 무한정 이어지는 회귀에 종지부를 찍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종지부에 서로 다른 기기의 캘리브레이션 Calibration(표준 등을 사용해서 서로 다른 기기들을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캘리브레이션에 의해 서로 경합 중인 주장을 비교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준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캘리브레이션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캘리브레이션이 사회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콜린스는 이에 대한 아주 명료한 대답으로, 사회적 협상이 이 캘리브레이션 과정에 연관되며, 실험자의 회귀를 종결지어주는 것이 바로 이 캘리브레이션 과정에 얽혀 있는 사회적 협상이라고 주장했다.”(30, 38)

3. “17세기 과학 혁명기의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과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 <리바이어던과 진공 펌프>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 form of life’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실험적 삶의 형식’을 검토했다. 이 실험적 삶의 형식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실험에는 이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은 보일의 공기 펌프 실험이 과연 어떻게 재현되었는가를 정밀하게 탐사했다. … 섀핀과 섀퍼의 논의는 사실상 ‘실험으로의 복귀라고 하는 1980년대 중반의 커다란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32)

4. “1983년에 출판된 이언 해킹 Ian Hacking의 <표현과 개입 Representing and Intervening>이라는 책은 … 관념론 idealism 대 실재론 realism 논쟁을 다루고 있다. … 그의 주장은,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과정에 우리의 개입 intervention이나 조작 manipulation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보기만 하는 경우란 거의 없고, 보기 위해서, 또는 더 잘 보기 위해서 보는 과정에 다양한 방법으로 개입한다는 얘기다. 이런 개입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현미경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해킹은 실험 실재론 experimental realism을 단언했으며, 이러한 실험 실재론의 중심 주장은 사물을 조작하는 정도가 사물이 존재하는 정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39)

_ 홍성욱(1999).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