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과 합리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 … 어찌 보면 이것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등의 사회 과학이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특히 197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등의 실체가 도대체 무어냐는 대단히 공격적인 질문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강력한 답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그러자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이기심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동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한발 더 나아간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서 합리적 이해타산에 몰두하는 개인들의 이합집산을 설명하는 게임이론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비록 화폐와 재화가 오고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빚어내는 결과임은 동일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굳이 경제학과 독립된 사회 과학의 영역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경제학과 동일한 방법으로 통일해나가는 것이 과학적 사회과학을 위하여 마땅히 나아갈 길이라는 것이다. 특히 소위 신제도주의경제학(new institutional economics)이 출현하면서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다 이기적 개인들의 행동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접근이 성행하게 되자 경제학은 모든 사회 과학 분야 일반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고, 전통적인 사회 과학의 영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된다. 소위 “경제학 제국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2. “경제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윤리학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초기 근대 유럽에서 경제학의 모태가 되었던 학문은 프로이센의 경우는 국가경영학(Staatswisenschaft)이었지만 프랑스나 영국의 경우에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애덤 스미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후치슨(Francis Hutcheson)은 모두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들이었다. … 윤리와 도덕의 문제는 지금도 이 학문의 가장 중요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주류 경제학의 모든 명제는 ‘당위’인지 ‘현실’인지가 뒤섞여 있다는 데에 있다.”

3. “애덤 스미스는 결코 탐욕이나 개인적 이기심을 인간의 유일한 ‘본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이러한 태도를 정당화하면서 스미스를 들이대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지만, 사실 스미스에게 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가 선택한 ‘자연법’이라는 이야기 방식에 문제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뮈르달(Gunnar Myrdal)이 젊은 시절에 이미 강력하게 제기한 바가 있지만, 이 이야기 방식의 문제는 ‘당위’와 ‘현실’을 항상 헷갈리고 애매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4. “스미스는 맨더빌의 논지를 발전시켜서 인간의 이기심을 인간 성정(性情)의 자연스런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오히려 사회의 조화를 가져오는 메커니즘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가 선택한 논리 전개의 방식은 ‘자연법’에의 호소라는, 맨더빌보다 훨씬 심오한 관점이었다. 개별자의 이기심이 충돌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전체의 조화가 창출된다는 것은,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우주와 자연 전체에 편재하는 보편적인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도덕철학자로서의 스미스의 오랜 사색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5. “호혜성이니 함께 사는 경제니 하는 말들은 좋은 정신을 담고 있는 소중한 말들이지만, 막상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제도나 조직 형태 또 규칙 등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모두 다 느낄 수 있는 바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생활협동조합에서 회원들끼리의 상호신용금고와 같은 금융기관을 만든다면 정관을 어떻게 해야 하고 대출 행태는 어떻게 해야 할까?어떤 점에서는 시중 은행과 비슷해야 하고 어떤 점에서는 달라야 할까?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 ‘게임’을 설계해야 모두 최대의 혜택을 보면서도 또 협력과 상생의 정신을 더 강화하여 조직 전체의 인간적 단결을 도모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을 때에 정태인이 제시한 방향의 연구는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 “베블런은 사람들이 서로 ‘나도 살고 너도 살고(live and let live)’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공동체 전체의 물질적 복리를 불리고자 하는 제작자 본능(workmanship)이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발현된 활동을 산업(industry)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리고 자기가 일하기보다는 남의 일한 것을 빼앗아오는 수탈자 본능(predatory instinct) 혹은 불한당 근성(sportsmanship) 또한 있다고 보아 여기에서 나타난 활동의 역사적 형태의 하나로서 영리활동(business)을 정의한 바 있다. 베블런이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이든 신고전파이론이든 소위 ‘생산성’이라는 것을 상정하여 그것을 노동이든 자본이든 개개의 생산 요소에 돌리는 것은 모두 미신이라고 보았다. 진정한 생산성이 있다면, 이는 사회 성원들 모두가 서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 전체의 지식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리 활동’은 이러한 공동체 전체의 믿음과 이해에 기초한 산업을 지배하여 그것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윤의 근원을 삼을 뿐만 아니라, 이윤에 도움이 된다면 그러한 산업 활동 자체를 깽판놓는(sabotage) 행동을 아예 중심 원리로 삼아버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력을 생산성 향상을 통한 자본 축적으로 생각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베블런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복리를 제한하는 본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여기에서 사회적 생산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자들끼리 서로 돕는 민주주의적 질서를 강화하여 영리활동의 ‘비생산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7. 자연법의 외양을 갖추고 당위와 현실의 경계에서 사회의 윤리를 주조하는,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