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은 만년의 엥겔스의 제자입니다. 카우츠키는 일찍이 독일로 돌아왔지만 베른슈타인은 영국에 남아서 엥겔스의 조수 역할을 했습니다. 엥겔스의 유산상속인이 될 정도였기 때문에 신뢰가 두터웠던 셈이지요. 그 베른슈타인이 엥겔스 사후에 <공산당선언> 이래의 맑스-엥겔스의 혁명론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배신이다, 수정주의다’라고 비판한 것이 카우츠키입니다. 카우츠키는 사회주의 최고 이론가로서 레닌에게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이른바 2월 혁명, 아니 혁명이라기보다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한 쿠데타를 비난했습니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혁명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쿠테타에 의한 권력강탈로 사회주의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문에 레닌에 의해 ‘배교자 카우츠키’라고 규탄되었습니다. 하기는 그전에 카우츠키는 1차 대전 때 독일의 참전을 지지하기도 했으니까요.”

“내 생각으로는,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이념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사이에 이념, 즉 통정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방기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현상을 긍정하게 돼버립니다. 실제로 그는 독일의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에는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념’을 유지하고 있다면, 현실적인 타협은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타락이 되고 맙니다. 다른 한편, 카우츠키에 대해서도 나는 재미있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우츠키는 예를 들어, <기독교의 기원>이라든가 <중세의 공산주의>와 같은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근대 이전의 종교운동에 소급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엥겔스의 영향이지요. 엥겔스는 젊었을 적에 <독일농민전쟁>을 썼지만, 거기서 종교적 지도자 토마스 뭔처에게서 공산주의를 보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자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엥겔스는 오히려 종교에서야말로 공산주의 운동의 최초의 발현을 본 것입니다. 카우츠키는 그것을 한층 확대하려 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서양과 기독교에 관해서 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층 넓게 생각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교환양식 D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최근 나는 그것에 관해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