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김광석은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그렇게 말한 시인은 최승자다. 삼십 세에 대한 으리으리한 경고는 너무 흔하다. 스물아홉 가을, 나는 갓난아이에게 홍역 예방 접종을 맞히는 엄마의 심정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와라! 서른 살, 맞서 싸워주마. 절대 지지는 않을 테다. 그런 식의, 유치하지만 제법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13)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43)

“그렇다고, 결혼 제도 밖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아니라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 그 학급 구성원들의 암묵적 규칙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혼자 점심시간까지 기다려 독야청청 숟가락질을 하더하도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재인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조바심치며 도시락 뚜껑을 연 것 뿐이다. 반찬 통에 담겨져 있던 개구리가 툭 튀어 나와 어느 쪽으로 도망가버릴지, 뚜껑을 열기 전에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134)

“머리가 띵했다. 일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 약육강식의 조직 시스템은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고부동하게 주장해론 남자, 남유준이 일을 하겠단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탄식을 억지로 삼켰다. … “일반 기업체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이는 다 지났더라. 이쪽은 경력 없어도 발 들이밀기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네.”"(221)

“유희가 머리통을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나 역시 그렇다.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 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227) 

“가진 것 - 입가의 팔자주름, 알량한 통장 잔고, 깔고 앉은 원룸 전세금, 반 의절 상태인 부모, ‘한심하게 살기 대회’ 대표 선수 같은 친구들,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실속 없는 추억들. / 못 가진 것 - 남편, 아이, 직장. 겨우 세 가지가 부족할 뿐인데, 왜 이렇게 처참한지 모를 일이었다.”(336)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53)” “그거 나는 왠지 무섭더라고요. 하늘에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내려다보면서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지정해준다는 게 말예요.”(347) “시동을 끄면서, 내비게이션은 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늘에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일일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까무러칠 듯 무서우니까. 그 남자 ‘김영수’가 옆에 있었다면 동감의 미소를 보내주었을 것이다.”(427)

“그러나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나는 정말, 서른두 살의 나이인가? ‘서른두 살스러움’의 기준, ‘서른두 살적인 사고방식’의 기준은 대체 누가 정하는데? 한 개인이 일상의 지층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에 처했을 때에 그런 소속 집단에 대한 선입견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속 집단의 규범에 의지하여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에게 나는, 우주 속의 유일한 개체. 새끼발가락에 티끌만 한 가시가 박힌대도 단독의 고통을 감내하며 작은 방 안을 홀로 뒹굴어야 한다.”(432)

“그러나 지금 여기, 맵고 달콤하고 뜨겁고 말캉한 떡을 묵묵히 씹어 삼키고 있는 나의 심장은 1초에 한 번씩 진지하게 뛰고 있다. …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440)

* 정이현(2006). 달콤한 나의 도시. 서울: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