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이라는 용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비단 이 용어만이 아니기는 하지만,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철학이라는 용어야말로 임화의 ‘이식’ 문학론이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되어간 과정을 통해 더욱 잘 증명된다. 3·1운동에 덴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고 좀더 효과적인 내선일체를 수행하기 위해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2. “박치우는1909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던 1928년, 같은 강의실에는 훗날 5·16 쿠데타를 반기고 박정희를 도와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박종홍이 있었다. … 두 사람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유럽과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번졌던 ‘하이데거 유행’에 대한 박치우와 박종홍의 시각은 무척 예시적이다. … 두 사람에게 고루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호세이 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미키 기요시를 꼽는다. 1923년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를 사사한 그는 귀국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보급하기 위해 애를 쓴 학자다. ‘마르부르크 시절 이래 내가 경험한 이른바 불안의 철학이나 불안의 문학이 몇해 뒤에는 일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몇년 뒤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나 독일에서처럼 하나의 요소, 즉 마르크시즘의 유행이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순서다.’”
3. “박치우는, 자주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불안의 철학을 공박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획득된 시민계급이 산업사회가 빚어낸 소외와 위기(공황)의 극복을 시민계급 내부의 모순(빈부)과 경제 기구에서 찾지 않고, 정신이나 내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불안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박치우는 이들에게 놓인 전망이라고는 슈펭글러와 같은 숙명론의 설파나 파시즘에의 투항밖에 없다면서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비판했다. 반면 하이데거로 졸업논문을 쓰기도 했던 박종홍은 나치에 협력했던 하이데거의 오류까지 따라하는 오욕의 길을 갔다.”
* “「존재와 시간」은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 있던 하이데거가 쾰른대학으로 옮겨간 선임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후임으로 오르디나리우스 프로페소르(정교수)가 되기 위해 급하게 쓴 책인데다가 내용이 전적으로 현존재 분석이므로 중언부언이 많은 책이다.”(소광희, 200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