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지난 2박 3일(6. 26.~ 6. 28.) 42시간의 여정을 남긴다. 관계는 소통으로 형성되고 소통은 다음의 3가지, 즉 대화ㆍ밀담ㆍ잡설로 구성된다. 대화는 공적 의제에 대한 의견의 교환이고, 밀담은 사적 일상에 관한 심상의 표출이며, 잡설은 이도저도 아닌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다. 만약 무리 속에서 대화가 실종되고 밀담이 주를 이룬 채 잡설이 횡행한다면, 이러한 교유관계는 지속할 이유가 없다. 공적인 담론이 의식 속에서 밀쳐진 채 먹고 사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기존의 삶의 양식에 안주하며 기껏해야 그 테두리 내에서 성공한 다소 유쾌한 사람으로 비쳐지길 바라는, ‘화석화’의 길을 굳이 견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적 의제가 묻히고 신변잡기가 주를 이루는 만남 속에 우리의 시야는 ‘자신’으로 좁혀지고, 그에 따라 은연중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로 인해 우쭐하거나 움츠러든다. 때때로 이러한 미묘한 강약 구도가 견디기 어려워지면, 너나 할 것 없이 화제를 돌려 텔레비전만 틀면 쏟아지는 재담들을 간간이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적당히 때워지면 모두들 아쉬움을 내비치며 다음을 기약한다. 이와 같은 현대판 친교의 전형들은 인생의 의미를 의심케 하는 낭패감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었는가?
2. “생각할 틈을 주지 말라”던 그의 말을 전해 듣고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친절히 가르쳐준 몇몇 사람들을 마주하며, 유대인들의 애도 방식이나 곡비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비애를 게워내던 옛 사람들을 떠올리는 내 자신이 얼마나 그의 슬픔에서 이격되어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고인을 애도하는 순간에도 내가 돋보이길 원했다. 나는 살아있는 나를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3. “네가 자랑스럽니?”라는 질문은 “지금보다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해는 가장 잘한 오해이듯, ‘주께서 허락하신 재능을 구현해나가는 상태에 대한 자신의 인정’이 바로 ‘자랑’이라는 재정의가 이뤄졌다.
4. 거시에서 미시로 들어오는 것이 실존의 무기력함을 깨달아가는 회한의 여정이라면, 미시에서 거시로 나아가는 것은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5. 인권의 옹호가 급진적으로 비쳐지는 이유는 그것이 아량을 베푸는 관대함과 달리,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도덕 행위라 할지라도 그 행위가 보편적 법칙에 상응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은 미시적 관용으로도 거시적 포용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이 일치할 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다.
6. ‘살면서 좋은 것만 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영화까지 암울한 것을 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돌이켜보니 어리석다. 영화는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일수도 있지만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망각하거나 외면하거나 인식하지도 못했던 불편한 진실을 담은 영상은 근거 없이 구축된 완고한 편협함을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해체시킬 수 있다.
7. 가장 효과적인 비판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다. 즉, 타자의 일리를 인정하되 “상이하나 보다 절실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은연중에 타자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고 상대의 입장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티븐 코비가 <7 habits>에서 예시한 ‘엄마 잃은 아이들의 지하철 난동’과 ‘주위의 만류 권고에 대한 아비의 발언’에 뒤이은 ‘승객들의 태도 변화’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