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차례의 회식 자리에서 나눈 잡설과 사견, 그리고 가필

01.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인격’의 개선 가능성이야말로 교육의 존재이유이다. ‘휴먼리소스의 레벨업’은 수월하게 이윤을 창출할지는 모르나 정의롭게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다.

02. 춘추전국시대 오백년을 토대로 쌓아올린 제자백가는 ‘리더십’의 보고이다. 최명 교수의 <춘추전국의 정치사상>을 정독할 필요가 있겠다.

03. 취향에도 품계가 있고, 품계는 안목에서 비롯된다. 다만 비등한 안목(氣)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성품(質)에 따라 취향은 다양할 수 있다. 주희에 따르면, “마음의 기(氣)가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흐린 사람은 어리석다. 질(質)이 순수한 사람은 현명하고, 잡된 사람은 불초하다. 기(氣)의 청탁(淸濁)은 앎에 관계되고, 질(質)의 수박(粹駁)은 행위에 관계된다. 기질에 따라 본성을 실현하는데 차이가 나고, 그것이 사람의 개성을 좌우하게 된다. 요컨대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은 인의예지의 본성이 기질의 차이에 따라 발현되는 모습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04. 인사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간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05. 입력은 주관적으로, 출력은 객관적으로.

06.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거든 말을 아껴라.

07. 너는 지위/실력/인격/신앙 순으로 나를 평가하나, 그는 신앙/인격/실력/지위 순으로 나를 세워간다.

08.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지 않으면 돌아서서 할퀸다. 상대의 일리를 수긍하고 쟁점 위로 올라서라. 마치 뜀틀 하듯.

09. 인간의 법으로 신의 법을 재단한 ‘아이히만’의 변명, “공의를 위해서라면 살인할 수 있다.”

10.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곧 주권의 양도이다.

11. 약점에 자신감을 저당 잡히지 말라.

12.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을 혼동해선 안 된다. 가령 “시공사 사장에게는 소중한 아버지일 텐데, 그렇게 막말을 해서 되겠어.”

13. 대중은 불편케 하면 불평한다. 불평마저 억누르면 내부로 곪든가 외부로 터진다.

14. “몇 십 년이 흐르고 내 생각이 변한 뒤에 다시 들어도 녹음에 남아있는 해석만으로도 감동이 전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나의 음악을 나눌 수 있는 통로는 녹음뿐이다.” 장한나의 칼럼을 읽고 ‘키팅’ 선생님이 떠올랐다.

15. 언론에서 다루지 않으면 대중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 지난 8월 29일부로 조, 중, 동, 매경, 한경, 문화일보는 다음포털에 기사제공을 중지했다.

16. 안단테 칸타빌레. 천천히 노래하듯이.

17. 아무리 상관없다고 부인할지라도 ‘중력’의 법칙 마냥 어쩔 수 없이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원’의 문제

18. 성공적인 대담의 관건은 상대방의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9. 실종신고 - 배려, 사망신고 - 애정. 왜 나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는가.

20. 인상 혹은 성향 비판은 미성숙한 성숙의 한탄이거나 성숙한 미성숙의 치기이다.

21. 위선에 목숨을 다하면 진심이 될까?

22. 험담하지 말자. 이것 또한 순결과 결부된다.

23. 팔월의 마지막 날, 매미의 울음은 멈췄고 나는 어른이 됐다. 늘 동일한 길이를 유지했던 점선은 두 개의 점이 됐다. 하나는 마음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여력이 없었다. 김샌 맥주를 한 잔 들이 킨 셈이다.

24. 현지화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으로 인한 소구력 감소’(cultural discount)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다. 문제는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가 본질이냐’이다.

25. 회개해도 다짐해도 변화되지 않을 때 무의식적 기제를 조명하고 변화에 대한 열망과 함께 치유를 도우시는, 성령

26. 칭의는 상태가 아닌 신분의 변화이다.

27. 감정적 소통의 결렬로, 매일 만나도 소원한 사람에게는 무신경으로 화답하라.

28.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자발적 순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권위에서 나오며 그 권위는 진리와 거룩에서 나온다. (신8:2~3, 벧전3:15~16, 딤후2:15, 마10:6, 민12:3)

29. 습기(지지)를 얻지 못한 태풍(정책)은 상륙(실행) 후 소멸하고 만다.

30. 존양 없는 궁리는 맹목적이고, 궁리 없는 존양은 공허하다. 그리고 양자 모두 패악을 내포한다. 예를 들면, 이라크전과 가미카제가 그러하다.

31. 환상을 각성한 자아 곧 주체는 재차 현실로 도피하거나 환상의 전복을 기도한다. 후자의 경우 선결과제로 자아부인이 요구된다. 네오처럼.

32. 상상계와 상징계의 간극으로 환상이 균열될 때 실재계로부터 주체가 출현하여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환상을 보수한다.

33. 적극적으로 평판을 관리하라. 나의 이미지는 네가 가진 나의 모든 것이다.

34. 금융의 시대가 저물고 실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가치투자라는 이름으로.

35. 궁리와 존양을 함께 제고할 수 있는 방편, 음악. ‘음악에도 이치가 있다.’

36. 의리의 재발견. 올바름과 이로움의 일치. 논어 이인편에 따르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37.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하인의 눈에는 영웅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위대한 영웅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도 일상 생활을 공유하는 하인에게는 그 사람의 영웅적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38. 감정의 기복으로 표리부동한 자에게는 냉담하라.

39. 정의 없는 힘은 위험하지만 힘없는 정의도 곤란하다.

40. 극한의 피해의식을 집단적 프라이드로 승화시킨 참호 속 동지회

41. ‘안보보수’와 ‘시장보수’

42. 초라해지면, 영합층은 흩어지나 비토층은 뭉친다.

43.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무엇을 진실로 생각하느냐이다.

44. 구심점 없는 조직은 지리멸렬해진다.

45. 파킨슨의 법칙 : 업무증감과 상관없이 관료행정의 비대화에 따른 부하배증

46.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식의 축적도 실천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느 사람들이 제 앞의 문제에만 반응할 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세계의 문제에 반응한다. … 나는 베른하르트에게서 지성의 한 정점을 본다.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

47.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이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48. 정당과 괴리된 시민사회는 정치적 소외 혹은 포섭적 배제가 구축한 사이비-공공영역이다.

49.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50. 현실사회주의 붕괴 원인 : 수요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생산이 저조했던 이유, 노동력과 노동의사를 노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이유, 시장개방이 국영체제의 해법으로 등장한 이유

51. 데일 카네기의 저술은 ‘역행’에 도움이 된다. 다만 뿌리 뽑힌 ‘파란 수국’은 냉담히 시들 뿐.

52. 라틴어로 ‘나쁜(mal) 공기(ari)’라는 뜻을 지닌 말라리아는 모기를 통해 감염된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더 대왕도 모기에 물려 죽은 셈이다.

53. 재물을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나뉜다.

54. 부정화법이 입에 밴 사람에게는 뭐든 간결하게 답변한 후 질문을 던지거나 자리를 피하라. 상대방에게서 최선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인격이다.

55. 혼전순결은 문자 그대로 육체의 과거로 인해 미안해하거나 민망해하지 않는 것이다.

56. 셀프-리더십은 형용모순이다. 그냥 ‘자기 관리’라고 하는 것이 낫다.

57. 기존의 무언가를 바꾸고자 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시행착오 과정. 둘째, 관련기관 실태.

58. 이익은 집중시키고 비용은 분산시켜라 - 인플레이션. 역은 곤란하다 - 실업.

59. 성취심리 강의에서 ‘슬럼프 극복’ 방안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60. 부의 가치란 곧 기회비용의 크기이다.

61. “결정적인 것은 그것에 포함되는 요소가 아니라 그 요소들의 혼합 비율이다.”

62. “정치와 권력 속에서 인간성은 훼손되고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정치 행위 속에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고 성숙해간다.” - “그래야 한다, 그것이 본래 정치다.”

63. 상대적 합리성에 의해 ‘공평에 대한 인식’이 학습된다.

64.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유‘란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의 자유’와 다를 바 없다고? 글쎄 그건 ‘근대의 자유’를 너무 낭만적으로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비아냥이 아닐까. 근대의 자유는 관념이 아닌 욕망의 함수이며, 이는 개인의 소유권에 토대한 궁극의 객관적 실체인 국가에 의해 옹호되었으나,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국’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초국적 기업을 필두로 그 뿌리를 국경 너머까지 뻗어 자양분을 획책하기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주머니 속의 송곳 마냥 자신을 비호해준 국가 마저 뚫고 나온 셈이고, 마치 금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달러처럼 활개치고 있을 따름이다. 자유라는 기표에 온갖 숭고한 기의를 쑤셔넣지 말자. 관건은 ‘자유로운 인간이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이다.

65. ‘저렇게 변한 건 지독하지 못해서야.’ 폭력성을 차치한다면, ‘자원하지 않은 변화’의 시비는 명분의 적부에 달려 있을 텐데, 그렇다면 문제는 그 명분이 폭력성을 간과할 만큼 정당한가에 있다. 왈쩌의 주장대로, ‘정당한 전쟁’은 성립 가능한가.

* 결론 : 적당히 아는 것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