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적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흥미가 당기는 것에 노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이 흥미나 적성이라는게 참 묘한 것들입니다. 생각해보시고 과감하게 접으십시오. 대학 졸업하던 무렵, 제 동기와 함께 어느 회사 취직시험을 봤는데, 그 동기가 제게 그랬습니다: ‘너 레포트 잘 쓰잖냐, 그게 너 특기잖냐, 성질도 더러운 놈이 회사는 왜 갈라고 하냐, 미친척하고 대학원가라.’ 저에게 많은 힘이 된 말이었습니다.”

02. “[[조기유학으로 승부한 엄마표 자녀교육]] 이런 책의 주인공(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니 결코 저자라 불러줄 수 없다)을 만나보면 뜻밖에도 아주 반듯하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가 떠드는 말은 처음에는 헛소리 같은데 듣다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자신은 그동안 인생을 너무 대충 살아온게 아닐까 하는 반성마저 불러 일으키는 그런 사람.”

03. 도시 전체가 병영과 같은 곳에서 인터넷도 끊은 채 이따금 주간지만 받아 보며 살고 있다. 일과 공부, 그리고 예배. 이 3가지가 내가 하는 행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니, 중세의 수도사와 다를 바 없다. 이곳의 대다수가 국가의 녹을 받고 관사에 거주해서인지 거대한 금융공황과 부동산 대폭락에 따른 민심의 흉흉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유가 상승에 따른 차량 2부제 실시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소시민들만 그득하다. 때로는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없어 가정사 너머로 화제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 머쓱하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영육의 정화를 맛보며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 변증’과 같은 이런저런 관념적인 논쟁에 몰두하는 고상한 취미를 즐기기도 한다. 물론, 그럴 정서적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속세로부터 다소 거리를 둔지 만 3년이 되어간다. 나름 열심히 무언가를 채워 넣었건만, 가끔씩 상경하는 수도 서울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지난 20년간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서울의 공기는 자유는커녕, 속이 아려올 만큼 답답한 메스꺼움을 폐비간신에 구겨 넣는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그것을 토해낼 수는 없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어쩔 수 없는 현실, 마치 사막과 같은 실재계가 경쟁력 있는 포트폴리오와 자아이상을 일치시키도록 추동한다. 형편없는 놈이 되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복종해야 한다.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위안을 찾을 수 없다. 그들과 어울리는 거리에선 ‘다른 길은 없다’고 속삭이는 근엄하고도 속물스러운 성적 충동들이 영육을 헐어 버린다. 지칠 때도 지쳐 버린 나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진정 다른 삶은 허용되지 않는가. 궁핍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살 수는 없는가.’

04. “그는 예술가라기엔 식상하고 운동가라기엔 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