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rief history of the Left in South Korea
“이석기와 나는 동갑내기다.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린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초중고를 다녔고 대학에 들어가선 그간 배운 것에 대한 회의와 반감에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접어든 사람들이다. 당시엔 주사파는 물론 반미도 없었다. 운동의 목표는 ‘미국 같은 자유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광주학살의 배후가 미국이라는 게 드러나고서야 운동은 미국이라는 성역을 넘어선다. 85년 무렵 반미의 극단화한 형태로 김일성과 북한을 좇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출현하면서 운동은 크게 둘로 나뉜다. 주사파와 엔엘(민족해방), 그리고 민족보다는 계급적인 문제를 천착하는 피디(민중민주). 2000년 ‘의회를 통한 자본주의 극복’을 표방하는 피디 계열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진다. 민노당 초기에 주사파는 소수 였지만 ‘특유의 생활력’으로 수년 만에 다수파가 되고 결국 당권을 장악한다. 2008년 민노당의 피디 계열은 ‘당권파의 전횡과 패권주의에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며 진보신당을 만든다. 2011년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두 대표는 탈당하여 민노당 당권파의 통합진보당에 합류한다. 그들의 희한한 행태는 ‘반이명박 연대’의 깃발 아래 덮이고 두 사람은 의회에 진출한다. 이석기와 주사파 동료들도 의회에 진출한다. 그 과정에서 ‘통진당 사태’가 일어난다. 운동권 내부에서나 통용되던 ‘경기동부’가 대중적 시사용어가 되고 ‘타락한 진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노회찬, 심상정은 당권파를 비난하며 다시 정의당을 만든다. … 주사파와 함께 못하겠다며 신당을 만들었다가 다시 주사파와 결합해선 국회의원이 되고 여론이 악화되자 ‘비밀리에 활동해서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다’ 발뺌하는 심상정이나, 주사파와 결합을 반대한 진보신당 당원들을 ‘좌익소아병’이라 비난했다가 이젠 주사파를 ‘정신병자들’이라 비난하는 진중권 같은 딱한 사람들도 있다.”(김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