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9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미래의 이념을 경멸하고 있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은 미래의 이념 없이도 가능하며, 현실에서 생겨나는 모순에 입각하여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89년 이후에 나는 변했다. 그때까지 나는 종래의 맑스주의적인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 비판은 그들이 강고하게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들이 존속하는 한에서 단지 부정적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붕괴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2. “이리하여 나는 90년대에 들어서서, 특별히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입장(stance)이 근본적으로 변해 왔다. 나는 이론이란 단지 현 상태의 비판적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지만, 사회 민주주의는 내게 있어 전혀 적극적인 전망일 수 없다. 내 속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부터였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 적은 것과 같은 전망이 보이고서부터 나는 일본에서 새로운 어소시에이셔니스트 운동(New Associationist Movement, NAM)을 시작했다.”

3. “내가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 사이에서의, 즉 칸트적 비판과 맑스적 비판 사이에서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요컨대 칸트로부터 맑스를 읽고 맑스로부터 칸트를 읽는 시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칸트와 맑스에게 공통된 ‘비판(비평)’의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비판’이란 상대를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음미이며 오히려 자기 음미이다. … 학문적인 글쓰기 방식으로서, 예를 들어 맑스나 칸트에 대해서라면,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자기의 학설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을 위해 새삼스레 책을 쓸 마음이 없다. 나는 칭찬하기 위해서만, 또는 칭찬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만 쓰고 싶다. 이 책에서 나는 칸트나 맑스에 대해 그들의 하찮은 흠을 들추어내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할 수 있는 한에 그들을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 책 이상으로 그들을 비판한 책도 없다고 생각한다.”

_ 柄谷行人(2010). トランスクリティーク:カントとマルクス. 이신철(역). 트랜스크리틱. 도서출판 b. pp.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