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πάθει μάθος’(pathei mathos)라는 희랍의 격언이 있다. pathei가 ‘겪다’, mathos가 ‘배운다’는 뜻이니 묶어서 ‘겪음과 배움’이고, 흔히 ‘고난을 겪음으로써 지혜에 이른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말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에 처음 등장한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도다.
(176-178)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는 조금 변형된 형태로 나온다.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들을 받게 되어,
늙어서 지혜를 가르쳐준다네.
(1351-1353)

뭐가 문제일까? 뭔가를 겪고자 할 때에도 막연하게라도 미리 설정된 좋은 목적이 있어야 그 겪음이 의미있는 것이다. 여기서 ‘겪음’과 ‘좋음’은 서로 맞물리는 관계에 있다. 좋음을 상정하지 않고 무작정 겪는 것은 나쁜 지혜에 이르게 하고, 겪음을 전제하지 않은 좋음은 무기력한 앎만을 남겨줄 뿐이다.

2. “일단 대통령직에 오르면 잘잘못을 알려 주고 진정으로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재교육을 받거나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사건이 너무 빨리 벌어진다.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거나 믿을 만한 전문가들을 찾을 수 있지만, 혼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대부분의 경우 교육, 타고난 지성, 경험이 뒤섞인 직관에 의지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구절은 “교육, 타고난 지성, 경험이 뒤섞인 직관”이다. 교육 – 이것은 좋음을 향한 숙련이다. 특정한 기예를 몸에 붙게 하는 학습과 다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힘이 지성이다. 사실 지성은 타고나지 않는다. 그것은 습득되는 것이다. 지성의 습득은 지성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가끔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볼 줄 아는 반성적 사유의 힘도 여기에 속한다. 경험이 뒤섞인 직관 – 이것이 파테이 마토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공식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상세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없다.

3.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느 지점에서 그들은 ‘좋음’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살인자의 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악한 자가 된 것일까. ‘좋음’만으로도 ‘겪음’만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은 이래서 수수께끼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life unworthy of life)에 대조되어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했던 말,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for a human being. 음미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만한 삶이 아니다”(38a)가 떠오른다. ‘좋음’과 ‘음미’와 ‘겪음’ – 이 셋을 모두 가질 수는 없는가.

* Written by frostpath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