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다면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란 스미스에서처럼 실물경제를 거울처럼 비추고 그 자체로는 경제에 아무런 영향도 안 주는 ‘중립적 베일’이나 상품교환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생산과 배분은 권력에 기초하고 있고 여러 사회적, 경제적 행위자들 사이의 투쟁은 화폐에 가치변동을 일으키고 그들 사이에 이익과 손해를 배분한다. 국가와 자본의 ‘동맹’으로 제도화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신용화폐의 가치의 변동은 이를 매우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화폐가 중립적이지 않고 편파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화폐가 상품이나 교환수단이기 이전에, 국가와 자본의 청구권 또는 채권-채무 관계, 즉 사회적 부와 권력관계를 계산하고 표현하는 지불수단인데 기인한다.”
2. “첫째, 화폐는 일차적으로 교환수단이 아니라 “채무를 변제하는데 쓰이는 ‘청구권’ 또는 ‘신용’”(또는 채권)이다(106면). 잉햄에 따르면 화폐는 귀금속과 같은 상품이 교환의 매개체가 됨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채무를 계산하고 청산하기 위해 생겨났다. 화폐의 기원은 청구권 또는 채권-채무 관계를 나타내는 증표에 있다. 국가는 재화와 서비스를 준 구성원들에게 채무에 대한 상환을 약속하고 채무증서(charta)를 발행한다. 민간은행은 환어음(bill of exchange)을 발행하여 상인들이 신용거래를 할 수 있게 해준다. 거래에서 환어음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에 대해 그 만큼의 가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채권을 가진다. 따라서 환어음 또한 일종의 채무증서이다. 간단히 말해 국가와 은행은 채무를 지고 채무상환을 약속하는 채무증서를 발행하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와 은행에 채권/청구권을 가진다. 이러한 채무증서가 바로 화폐의 기원이 된다. 사람들이 채무증서를 국가와 은행에 들고 가 채무를 상환 받는 대신 제3자와의 거래에서 주고받으며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국가와 은행이 발행한 채무증서를 제3자와의 거래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는 화폐로 신뢰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국가와 은행의 채무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그리고 이후에 화폐로 발전하는) 증서의 가치는 그들의 권력(조세징수 및 자원동원 능력) 또는 부에 의해 뒷받침될 때 신뢰받을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채무를 상환할 능력, 즉 지불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불능력이란 1971년 브레턴우즈 국제통화체제 붕괴 때까지는 대체로 금과 같은 귀금속 보유량을 의미했고 그 이후로는 국가와 은행이 사회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즉 권력에 기초한 순수한 신용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이 증서를 누구든지 국가와 은행에 빚진 채무(또는 내야 되는 조세)를 청산하는데 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면 이 증서는 널리 쓰일 수 있다. 이제 채권자들은 국가와 은행에 직접 채무증서를 들고 가서 채권-채무 관계를 청산할 필요가 없다. 국가와 은행에 채무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채무증서를 주고 그 사람들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국가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사람은 매우 많고, 은행 또한 충분히 크다면 은행에 채무를 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은행에 대한 채권-채무 관계가 제3자에게 양도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채무증서는 재화와 서비스를 매매하는데 사용되는 화폐-교환수단으로서 널리 유통될 수 있다.”
3. “둘째, 화폐는 사물이나 상품이 아니라 청구권 또는 채무의 크기를 재는 ‘추상적’ 계산단위이다. (사물이나 상품을 대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귀금속과 같은 상품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주화를 사용하던 시기에도 화폐의 가치가 금속함량과 관계가 있었던 적은 없으며, 다만 일정량의 금이나 은로 교환해주겠다는 약속만이 가치를 보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일 뿐 그러한 약속을 제공하던 금본위제 시기에도 놀랄 만큼 적은 금으로 파운드 국제통화가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금보유량이 아니라 파운드라는 계산 단위였다(<돈의 본성>, 286면). 화폐의 기원이 청구권과 채권-채무 관계를 표시하는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나타내는 증표들은 귀금속과 같이 반드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일 필요가 없었다. 대신 그것은 청구권, 채권-채무의 크기를 계산하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부에 대한 청구권, 채권, 채무를 나타내고 계산하는 추상적 단위, 즉 계산화폐이다. 그러므로 화폐란 ‘한국은행권’과 같은 중앙은행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앙은행권은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화폐라 하면 은행계좌에 기록된 숫자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4. “셋째, 현대의 화폐는 단순히 계산화폐이자 청구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신용화폐라는 특수한 제도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화폐형태는 베버의 표현을 따르면 국가와 자본의 “기념비적인 동맹”(92면) 덕택에 발전했다. 국가나 민간은행 단독으로 발행한 화폐에는 결점이 있다. 채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폭력조직으로서의 근대국가는 설사 채무상환 능력이 있더라도 지불약속을 지키지 않을 위험이 있다(또는 국가 자신이 발행한 증서를 조세로 받아들이지 않을 위험이 있다). 이 경우 증서는 휴지조각이 된다. 또한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는 지불능력을 넘어서 증서=화폐를 남발할 수 있다. 이 경우 인플레로 화폐=채무의 가치가 하락하여 채권자가 손해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민간의 상인들은 국가를 그리 신뢰하지 않고 국가가 발행하는 증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국가가 발행한 증서가 신뢰할 수 있는 화폐로 기능하는데 제약을 가한다. 한편 은행이 사적으로 발행한 환어음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부도가 날 위험이 있다. 설사 부도가 나지 않더라도 사적 환어음은 기존의 거래관계 밖에서는 신뢰를 받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다. 역시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화폐로 기능하는데 제약이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공적으로 신뢰받는 현대적인 자본주의 신용화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국가와 자본을 매개하는 중앙은행의 설립 덕택이다. 현대적인 중앙은행의 시초는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이다.”
* Written by pepemor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