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지적처럼 “30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인들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종교적 무관심의 원칙을 평화의 기본으로 삼았다. 원래 신성로마제국의 신분들 간의 종교 내전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은 영주에서 발전한 독립군주들의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른바 ‘세속화’, ‘탈마법화’, 더 나아가 국가에 의한 종교의 지배는 근대의 중요한 계기이며, 이것은 ‘근대성’의 확실한 지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지표가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형성된 과정을 홉스 정치철학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홉스의 생애에서 두 가지 요소를 주목해 두어야 한다. 우선 그는 청년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말년에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영역한 고전학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1660년 대의 이른바 ‘홉스-보일 논쟁’에서 철학은 추론의 학문임을 주장하면서 실험철학을 강조한 보일과 대립했으며, 이로 인해 왕립학회에 가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에 관한 홉스의 태도는 인문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국가는 과학에 근거한, 확신에 가득찬, 관용을 허용할 여지가 없는 절대주권의 국가이다. 그는 도덕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시작해서 리바이어던으로 끝을 맺었다. 리바이어던은 이전의 불관용을 제거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관용을 세운다. 이는 역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반드시 관용의 국가에서만 살아가는 법은 아니다.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전제적인 황제의 통치 하에서 살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의주의자들도 절대군주의 통치하에서 살았다. 근대 세계의 혹독하면서도 소외된 국가구조는 또한 회의주의자들에게 적합한 풍경일 수 있으며, 왜 그런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홉스이다.”

“합리적 예측이 위력을 잃을 때 정치는 마술이 된다.”(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마술로서의 정치는 대중의 동원과 결단주의 옹호에 의거 “사법적인 예외적 관리 권력”을 정당화한다. “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살육 때문에 합리적 예측 없이도 국가는 리바이어던이 되었고, 정치는 요술(妖術)로 변해버렸다.”(강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