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 없다’는 말은 그런 곤혹으로부터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구출한다. 그 말을 풀면 이렇다. ‘나는 진심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걸 구현할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는 말은 과연 대안에 대한 갈망이 담긴 말일까? 짐짓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은 아닐까? ‘대안이 없다’는 말은 실은 대안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안에 대한 태도에 관한 말이다. ‘대안이 없다’는 말엔 대안에 대한 피동적 태도, 대안이 이미 차려진 혹은 남이 차려주는 메뉴에서 고르는 것이라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대안은 ‘아직 차려지지 않은 것’이며, ‘나의 주체적 참여와 행동으로부터 차려지는 것’이다. 대안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지 않는 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일 뿐이다. 또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쓰고 싸워온 사람들과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기업 정규직 위주가 아니라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 환경오염이라는 피상적 접근이 아닌 생태계 전체의 문제를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과 결부시키는 급진적 생태운동, 동정과 시혜가 아니라 인간해방의 관점에 선 장애인 소수자 인권운동 등, 허다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라도 존경을 표시하고 연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김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