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믿을 만한 지식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왜 그럴까? 대다수 사람들이 과학자가 사용하는 ‘특별한’ 방법을 그 이유로 들 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연구를 수행하기에 그 결과가 참임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과학적 연구방법으로는 귀납법과 가설연역법이 거론된다. 귀납법은 여러 사실을 다양한 조건에서 관찰한 후, 이를 조심스럽게 일반화하여 귀납적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이에 비해 가설연역법은 특정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 후, 그 가설로부터 연역되는 새로운 현상을 관찰이나 실험으로 검증함으로써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귀납법과 가설연역법은 분명 과학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 두 방법이 과학의 진리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귀납법은 아무리 엄밀하게 적용되더라도 시간과 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랜 기간 하얀 고니만 보아왔던 유럽 과학자들은 흰색을 고니의 ‘본질적 속성’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도 고니를 백조라 부른다. 하지만 지구상의 보다 넓은 지역을 탐색하던 유럽인들은 호주에서 까만 고니를 목격하게 되었고 ‘검은 백조’가 형용모순이 아님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가설연역법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9세기 초 과학자들은 빛이 아주 작은 알갱이의 집합인지, 호수에 던진 돌이 일으킨 물결 같은 파동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때 빛의 입자설을 지지하던 푸아송은 빛이 파동이라면 완벽한 원반에 정면으로 빛을 비추면 생겨나는 까만 그림자의 정중앙에 밝은 빛의 점이 나타나야 함을 지적했다. 푸아송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빛의 파동설로부터 연역된다는 사실이 파동설이 거짓임을 증명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이 ‘푸아송 점’은 아라고의 실험에 의해 관찰되었고 동시대 과학자들은 이를 빛이 파동임을 입증한 ‘결정적 실험’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빛은 고전적 의미의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다. 대신 측정 상황에 따라 파동적 성질과 입자적 성질을 번갈아 보여주는 기묘한 양자적 실체이다. 결국 훌륭한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확립된 빛의 파동설조차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학을 믿을 만하다고 믿는 근거는 과학적 방법이 과학의 진리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일 수는 없다. 그 근거는 엄밀하게 검증된 증거를 통해 과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주장의 신뢰성을 공동체적 평가를 거쳐 결정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자들은 특정 주장을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경험적 증거나 이론적 증거를 요구한다. 물론 증거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개별 과학자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거의 대부분) 다른 과학자의 날카로운 검토 과정에서 걸러지게 된다. 그렇기에 과학지식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이다. 과학지식은 천재적 과학자의 뛰어난 마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제시된 여러 증거를 학문 공동체가 상호비판을 통해 엄정하게 평가함으로써 얻어진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과학이 믿을 만한 이유는 그것이 항상 참이기 때문이 아니라 힘들게 수집되고 치열하게 검토된 증거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인 것이다.”
“과학을 믿을 만하게 만들어주는 특징이 ‘증거기반 집단지성’임을 이해하고 나면, 과학은 참/거짓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이전투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나 어차피 과학자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니 각자가 알아서 결정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_ 한양대 과학철학 교수 이상욱(경향신문, 2014.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