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 해체주의는 한물 갔다. 그러나 그것은 더러 신역사주의 또는 문화유물론으로 알려진 비평학파로 변형되었다. 칼 마르크스를 계승하는 이런 비평가들에게 문학 텍스트는 작가가 살았던 사회의 권력 구조를 반영하는 문화적 인공물이다.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의 저작들 또한 이 시인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외치고 있는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탐구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맥락에 시인을 끌어와 배울 점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셰익스피어를 읽을 이유가 없다. 모든 작가가 권력 관계의 반영일 뿐이라면, 이는 현대의 비평가들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그들의 비평 역시 권력 관계의 반영일 뿐이니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51)
2. “일부 교수들이 근대의 분석적 기법을 고대의 원전에 적용하고, 그 원전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해야 현란한 실수일 뿐이다. 이런 교수들은 고대인의 시각에서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순히 역사적인 흥미로 고대 철학에 접근한다면 쉽게 지루해질 뿐이며 당연히 그렇게 된다.”(71)
3. “근대 정치이론에 관한 강좌들은 대체로 훌륭하지만 두 가지 교육적 접근법 때문에 학생들이 진정으로 씨름해야 할, 참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벗어나게 될 수도 있다. 먼저 철학적 텍스트가 생겨난 시대의 맥락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 읽는 탓에, 그 텍스트들과 오늘날 우리의 삶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전혀 가르쳐주지 못한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근대 정치이론은 골동품 수집가의 관심사와 마찬가지가 된다. 또 하나의 경우는, 이 위대한 사상가들의 견해가 오늘날의 정의와 권리 기준에 합당치 않다고 규정하며 그들이 여성과 소수자 문제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자랑하는 꼴이다.”(84~85)
4. “‘지식/권력’을 분석하는 푸코(1926~1984)와 데리다(1930~2004)와 같은 탈마르크스주의 인식이 문화사를 주도하는데, 이런 인식은 모든 사고가 한 사회의 권력 관계의 기능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문화사가들의 시도는 일정한 사상가의 저작에서 옳고 참된 것, 혹은 그릇되고 해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데 있지 않다. 그 사상가의 저작이 그 이후에 나온 사유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평가하는 것 역시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한 사상가의 관념의 기원을 경제적 권력 관계와 다른 권력 관계 속에서 드러내려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한 사상가의 견해가 설명된다고 하는데, 이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가들의 방식과 닮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우리에 관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문화사가들은 자신들에 관해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가? 문화사가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진정 이해할 수 있겠는가?”(122)
5.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서를 공부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다. 이는 대학의 성서 학자들이 근대 대학에서 확립된 역사비평 방법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데, 성서 연구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성서해석에 있어 이러한 방법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성서 텍스트가 ‘서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입장은 성서의 기록자들이 텍스트가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기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비평가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성서가 몇 겹으로 된 의미층을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여기서는 미묘한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신중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적 맥락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은 당연히 역사비평가들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성서에 대한 미묘한 접근법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역사적 비판가들은 처음으로 성서 텍스트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것이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세력의 산문이라 이해했으니 우리는 그들을 해체주의자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성서 텍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고도로 사변적인(그리고 더러는 환상적인) 고찰을 제시하면서도, 이 비판자들은 수세기에 걸친 전통 속에서 신자들 사이에서 정전이 된 텍스트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있는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 수많은 계몽주의 기획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비판가들 자신이 이데올로기적 선입견과 관용없는 마음가짐을 지녔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진다. 그처럼 새로운 탈계몽주의적 전망에 직면한 역사비평가들은, 이제 그들이 은연중에 전제하는 지적인 가정들이 자신들의 해석적 논증들을 완전히 순환론으로 만들어 버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세속화된 결론은 이미 그들의 세속적 전제에 함축되어 있고, 그것은 자율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142~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