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6년 제정 이후, 매 4년마다 2-4명의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이 영예는 흔히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캐나다의 수학자인 존 찰스 필즈(John Charles Fields)는 “1차대전 이후 국가 간 라이벌 관계와 동맹국 대 연합국 간의 적대만이 지나치게 부각되던 과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전 세계 수학자들 간 단합과 연대를 위해 필즈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필즈상이 ‘시샘을 부추길 수 있는 비교’를 지양하고, 과거의 성취보다는 ‘미래 가능성을 독려할 수 있는’ 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후에 필즈상이 40세 이하의 젊은 수학자들에게만 수여되는 전통의 근거가 되었죠.”

2. “필즈상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명성을 자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1950년에만 해도 수상자 두 사람은 자신들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 필즈 메달이 뭔지도 몰랐으니까요. 필즈상이 명실공히 수학계의 노벨상이 된 역사를 돌아보면, 종종 잊혀지곤하는 수학과 정치의 교차점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1966년 8월 5일,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너(San Francisco Examiner)지에는 UC버클리의 수학자 스티븐 스메일(Stephen Smale)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연루되어 하원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으나 모스크바로 도주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실 스메일은 소환장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유럽에 가 있었고,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 필즈 메달을 받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친소련파로 몰아붙이는 여론도 있었지만, 뉴욕타임즈 등 몇몇 언론은 조금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스메일의 동료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 즉 ‘스메일은 수학계에서 노벨상과 가장 가까운 상을 받기 위해 외국으로 간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 보도한 것입니다.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 말이었지만, 이 말로 인해 스메일의 입지가 달라졌고 그가 혐의를 벗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해, 스메일은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반전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긴 세력이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스메일이 ‘수학계의 노벨상’을 받은 수학자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그는 연구비를 지켜낼 수 있었죠. 그러니까 필즈 메달이 노벨상과 엮기게 된 것은 어찌보면 냉전의 산물인 것입니다.”

* 2014 서울 세계수학자대회 ICM·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8. 13. ~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