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오일쇼크는 중동전쟁과 중동지역 정세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죠.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열흘 뒤인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고시 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죠. 선언 이후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 고시가격은 4달러를 돌파했습니다. 3달 뒤인 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올라 2~3개월 만에 무려 4배나 원유가격이 폭등했죠.”
”우리나라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습니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 됐습니다. 당시에는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에너지수요가 많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죠. 1975년 성장률은 6.5%로 더 떨어졌고, 물가는 24.7%의 고공비행을 이어갔습니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은 석유의 전면 수출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여기에 석유업자들의 매점매석과 투기성 시장조작까지 횡행하면서 국제 석유시장은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었죠.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서자 배럴당 13달러 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 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에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제2차 오일쇼크에 대한 선진국들의 충격은 1차 오일쇼크 때보다 적었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반대였습니다. 대내적으로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 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죠.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어섰습니다. 1981년 성장률이 6%대로 높아졌지만 기술적 반등 수준이었으며, 물가는 여전히 20%를 웃돌았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피해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컸던 이유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확대 정책에 중점을 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