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대 후반에 탄저병은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가축, 축산농민, 수의사, 위생학자를 괴롭히던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이 병은 지역별로 숱한 변이를 보였기 때문에 세균과 같은 단일한 원인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실험실 과학과는 연관이 없다고 흔히 믿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탄저병이 발생한 농장에 임시 실험실을 차려 농민과 수의사에게 정보를 얻고 이를 자신의 실험과학 언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농장에서 채취한 탄저균을 파리의 실험실로 가져와 본격적으로 분리 배양하는 실험에 착수하였다. 그는 이미 약화된 닭콜레라 배양균이 백신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탄저균 백신을 동물에게 주사하여 병독성의 다양한 변이를 실험실에서 모방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1881년 파스퇴르는 농업협회의 후원으로 푸이 르포르 마을의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탄저병 백신의 공개 시연을 열었고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상했던 대로 대성공이었다. 푸이 르포르의 야외 실험이 성공했던 것은 사람들에겐 기적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실험실과 동일한 조건(소독·청결·보존·주사 동작·타이밍·기록 등)을 단순히 농장으로 확장시킨 덕분이었다. 이 실험 이후 탄저병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집단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이 생겨났다. ‘만일 당신의 가축들을 탄저병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면 파리에 있는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백신 플라스크를 주문하라.’ 이에 따라 탄저병 백신이 공급되는 상업적 회로 비슷한 것이 파스퇴르 실험실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의 통계기구는 탄저병의 전국적 감소를 도표로 기록했다. 이 사례 연구는 파스퇴르의 위대함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질적인 행위자들(탄저균·가축·농민·수의사·위생학자·언론·정부 등)이 과학자의 실험실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구축된 공고한 이해관계의 동맹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탄저병 백신을 둘러싼 이 행위자-연결망이 구축되기 전과 후의 프랑스 사회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 역시 연결망 구축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