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에게는 가장 작은 일화가 세계 체계보다 더 중요했다. 최고의 예술, 아니면 아예 예술성이 없는 것이 중요했다. 시인 아니면 그냥 단순한 연대기 기록자. 베를렌의 말처럼 ‘그 밖에 나머지는 그냥 문헌’이었다.”

2.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 – 우리가 오늘날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은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 –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 흔들림 없는 정신의 각성과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인해 영혼이 깊은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몽테뉴의 삶에서 근원적인 비극이었다.”

3. “에라스무스에서 몽테뉴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저술은 도시풍의 열린 마음과 회의적인 관용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평신도 문화의 새로운 특징이었다.” 이것은 중세의 종교적 지배를 뚫고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데 “17세기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 합리성을 제한하면서 거의 기하학적인 확실성이나 필연성만을 인정했다. 이론물리학은 이성적 연구와 토론에 적합한 영역이었지만, [16세기에 융성했던 실천철학들인] 윤리학과 법학은 그렇지 못한 것들로 간주되었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합리적’ 절차들을 존중하기는커녕 모든 주제들을 형식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희망을 추구했다. 그들은 오직 형식적으로 타당한 증명에만 몰두함으로써 ‘이성의 언어’ 그 자체를 바꾸어 버렸고, 결국에는 ‘이성(reason)’, ‘이성적(rational)’, ‘합리성(rationality)’ 같은 핵심 용어들의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전환, 넓게는 16세기의 인문주의적 근대에서 17세기의 이성주의적 근대로의 전환을 불러온 결정적인 사건은 30년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