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오래고 다양한 문자사에서 그 같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 꼴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 꼴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 기관을 본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grammatological luxury다.”
훈민정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인 동아시아학자 게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는 “한글의 제자원리를 설명하며 문자학적 호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한글을 창제한 동기가 불순했든 순수했든, 창제자들의 음운론 지식은 아마 그 당시 세계 최첨단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고 반포된 게 15세기 중엽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로마문자보다 2,000년 정도 뒤에 만들어졌어요. 그동안 지식과 지혜가 축적됐을 테니까 로마문자보다 더 뛰어난 게 큰 자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한글보다 더 뛰어난 문자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저 혼자서라도요.”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이 무슨 뜻이죠. 이걸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한다면 ‘바른 소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친다’가 되겠지만, 명사구로 생각한다면 ‘백성들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러면 이 ‘바른 소리’라는 건 뭘까요? 바로 당대의 중국어 발음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한자가 수입되면서, 수많은 중국어 단어가 한자어의 형식으로 차용됐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은 한국어 음운체계에 동화돼 세종 시절에는 중국어 발음과 너무 달라져버렸어요. 지금도 그렇죠. 天을 한국인들은 ‘천’이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티엔’ 비슷하게 읽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반포하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죠? 세종은 이걸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의 한국어 한자 발음을 되도록 중국어 원음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하니까 소리글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니까 ‘훈민정음’에서 ‘정음’이라는 건 대체로 중국인들의 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말합니다. 그 소리를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겁니다. 그 당시 한자 옆에 표기된 훈민정음을 보면 실제로 15세기에는 그 한자를 그렇게 읽지 않았는데도 되도록 당대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토를 단 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고종석,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