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그랬다. 다른 나라들은 현실과 텍스트가 서로 긴밀하게 대화하고 있었는데도 독일은 종교 비판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갈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이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영제국 사람들이 손에 쥐고 이리저리 만져보며 확인하던 현실은 독일에서는 수많은 중간 단계를 거치고 또 거친 후에야 인간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곧바로 현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한 형태로 성립할 뿐이었다. 현실은 현실이되 정신에 의해 매개된 현실이므로 정신적인 것이었으며, ‘날 것의 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칸트가 확실하게 제거해버린 형이상학이, 칸트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후학들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되어 고도의 사변으로 전개된 까닭도 이러한 현실 결여에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정치학(또는 독일의 용어로는 ‘국가학’) 관련 저작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1651년 출간된 홉스의 정치학 저서 <<리바이어던>>은 유토피아론이 아니다. 가공할 정도로 살벌한, 냉혹한 현실 분석이며 구체적인 대책이다. 그런데 1820년 출간된 헤겔의 <<법철학>>은 여전히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아무리 헤겔이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 중에서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해도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거리를 좁혀낼 수는 없었다. 독일의 현실은 그랬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식인들이 내세운 교양은 고작 정신성의 표현일 뿐이었고, 현실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무기력에 지나지 않았다. 베이컨, 홉스, 로크, 스미스로 이어지는 대영제국의 현실적 텍스트들은 서양사상의 주류인 수학적 세계관을 현실세계에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양으로 간주하여 계산해버리는 ‘산수적’ 현실대책과, 인간을 욕구 충족을 향해가는 이기심 덩어리로 파악하는 시각이 그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헤겔은 2세기에 유행하던 신비주의를 되살린다. 그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무시하고 결과가 원인이라는 시대착오적 순환논리를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제시한다. 어떤 이들은 경건함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인간의 열정과 천재성에 호소하기도 한다. 이것들 모두는 한마디로 달뜬 낭만주의이다.”(강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