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책을 저에게 온 편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파울 첼란을 좋아하는데 그는 자기 시들은 유리병 편지라고 그랬어요. 저한테도 책을 펼친다는 것은 유리병 편지에서 종이쪽지를 꺼내는 거예요. 얼마나 절절했길래 이걸 썼을까 라는 거죠. 저도 그렇게 글을 쓰니까요. 그래서 책은 절규, 비명, 고독 같은 것이에요. 사실 평화롭거나 안정적인 사람은 글을 쓰지 않아요. 써봤자 사치일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글은 어떤 알림이죠. 소리 내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느껴, 이렇게.” 외로울 수도 있겠고, 애정 받으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유리병 편지라는 표현이 적당하죠. 물론 실망할 때도 많아요. 유리병을 열어 봤을 때 ‘이거 뭐야’ 하고 찢어 버려야 될 것이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책을 받으면 정성스럽게 넘겨 보죠. 보다가 진짜 절절한 것들을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은 정말 좋죠. 저도 책 쓸 때 똑같은 마음이거든요. 책을 출간하는 것은 유리병 편지를 강물에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민이 많죠. 이게 도대체 누구한테 갈 것인가? 하는 문제 등. 그러니까 파울 첼란 이야기가 맞는 거 같아요.”
“근대 이전의 이야기들이나 신화 같은 것들을 보면 자기 동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가 사랑하는 애인도 죽이죠. 이런 더 큰 의미의 사랑, 공동체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 유대의 감정, 연대의 감정을 다룬다는 거죠. 그런 책들을 보면 지금 시대에 대해 약간은 회한에 잠기게 되죠. 영화로 나왔던 <반지의 제왕>의 원작도 굉장히 좋아요. 거기에는 지지부진하게 카페에서 헤어지니 마니 하는 게 없어요. 굉장히 큰 서사시예요. 지금 우리 공동체가 와해 됐기 때문에 서사시의 복원이 필요하거든요. 큰 담론들이 그런 서사를 품어주는 거죠. 우리 시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보면 밀실에 갇혀있어요. 굉장히 위험하죠.”
“인문학은 시작도 끝도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찬가이자 투쟁이죠. 그래서 김수영 시인이 “인문학은 불온하다”고 했을 때, 그 불온성은 소중한 거죠. 체제는 그런 걸 싫어하죠. 체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인간들이 자꾸 사랑하려 하고 자유를 찾으려고 하니 마음에 들겠어요? 인간이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찾게 돼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권력기구나 상사 때문에 힘들게 지내는 걸 보면 같이 싸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랑의 속내엔 자유가 있고, 자유를 파고 보면 사랑이 있어요. 그것이 인문학이거든요. 만약 여기에서 벗어났다면 그건 사이비 인문학이에요. 인간의 자유는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거나 사회를 위해서 사랑을 억압해야 된다거나 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힐링은 ‘여기서 뛰면 뭐해? 어차피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지각 변동으로 지층이 올라 올 텐데’ 하는 식이죠. 힘이 없게 만들고, 결단을 어디서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게 만들죠. 그런 것이 편하니까 비겁을 은폐하기도 좋죠.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개입할 필요도 없고요. 힐링은 우리가 19세기 이후에 인문학적으로 성취한 것에 비해서 너무 낙후된 개념이죠. 그런데도 그게 먹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비겁해졌다는 거고, 무기력해졌다는 거를 반영하는 거 같아서 씁쓸하죠. 힐링 중에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 누구를 용서하는 담론이에요. 그런데 용서는 강한 자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약한 자가 용서를 하면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약한 자들이 용서해요. 용서나 화해는 굉장히 강해졌을 때,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거에요. 지금은 약자들이 힐링을 해요. 위험하죠. 많이 위험한 담론이에요.”
_ 강신주, 2013.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