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소, 빨래, 밥짓기, 설겆이, 구두손질 등의 행위는 [나에게]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섬김의 일환이라면 ‘의의’가 있다. 왜일까? 주지하다시피 섬김은 외화된 노고가 귀환되지 않는 Poiesis다. 다시 말해, 섬김은 소외를 전제할 뿐더러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김으로써 우리가 풍성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아에 국한되어 있던 사랑이 확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섬김은 Labour도 work도 아닌 Activity로서, 자아의 경계를 공동체로 확대시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20:28)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2.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이 ‘주민의 상당 부분을 세상사에 무관심한 농촌 생활에서 떼어내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마르크스가 농촌 환경에 대해 도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멸 — 뿐만 아니라 무지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재미있는 이 독일어 구절(dem Idiotismus des Landlebens entrissen)을 실제로 분석해보면 Idiotismus는 ‘우매함’이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좁은 시야’나 ‘더 넓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그리스 어 ‘idiotes’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반영하는 것인데, 이 단어로부터 현재 쓰이는 ‘idiot’나 ‘idiocy’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자신의 사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더 넓은 공동체의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 1840년대 이후 몇 십년이 지나면서 — 그리고 마르크스와는 달리 구성원들이 고전에 대한 교양이 없던 운동 속에서 — 본래의 의미는 증발되었고 오독이 일어났다.” - Eric Hobsba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