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의 동료 78명은 그가 사망한 지 불과 12일 뒤, 올해 12월 말일자로 계약이 해지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 동료의 분신에 어느 날 전원이 해고되는 게 가능한 이 나라에서, 사태의 책임을 죽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에서 찾는 ‘1등 신문’의 활자가 칼바람처럼 차갑다.”
조선이 더 큰 안목으로 역지사지를 권고하자, 시사인이 불가해한 적반하장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형국이다. 조선은 모멸과 매도를 건드려 독자의 분노를 오해로 치환하고 있으나, 시사인은 굳이 주간지를 찾아 읽지 않아도 될 수준에서 ㅡ 그 논조가 응고되어 있다. 전혜원이 애써 울분을 삭히며 냉정을 잃지 않고자 했다면, 곽래건은 되려 감정을 자극해 비난을 거둬 들이게 한다.
옳으니까 옳아야 한다고 함은 동어반복이다. 옳음은 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식의 관철은 다소 억울하겠지만 김현의 단언처럼 파시즘과 닮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민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하다. 당혹스러우나, 조선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에 육박해 있다.
관건은 디테일이 아니다. 구체는 어느 지점에서 추상으로 전회해야 한다. 추상은 막연한 무엇이 아니다. 차원을 달리하여 자아와 상대를 초월하고 제3의 동의를 인수하는 사유의 노동, 이것이 추상이다. 양자를 다른 구도에 배치하는 의제 설정이 시사인에게 없다. 특종, 단독보도는 그물 안의 월척일 뿐이다. 혼동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