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군중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군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피부로 이 군중을 느꼈고, 이 군중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것 같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데모가 끝나 군중이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 나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보다 가련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고 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군중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방전’(Entladung: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 에너지의 폭발과 방출)이다. 방전이 일어나기 전의 군중은 본질적으로 군중이 아니다. 방전이 있어야만 비로소 군중이 생성된다. 방전의 순간에 군중의 모든 구성은 그들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고 평등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차이란 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 즉 계급, 신분, 재산 따위의 차이를 말한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항상 이런 차이를 의식한다. 이 차이는 개개인들에게 중압감을 주고 그들이 상호 고립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일정하고 안전한 위치에 고고하게 선 채, 온갖 몸짓으로 마치 자신이 남들과 거리를 유지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주장한다. 인간은 광활한 평원 위에 우뚝 서 인상적으로 움직이는 풍차와도 같다. 그리고 이때 그 풍차와 이웃 풍차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삶이 이 간격 속에서 펼쳐진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재산을 넣어두는 집, 그가 차지한 지위, 그가 바라는 계급, 이 모든 것들이 간격을 만들고, 확고하게 하며, 확대시킨다. … 인간은 함께 모임으로써만 이러한 간격의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군중 속에서 일어난다. 방전을 통해 온갖 괴리가 사라지고 모든 구성원이 평등감을 느끼게 된다. 몸과 몸이 밀고 밀리는, 틈이라고 거의 없는 밀집 상태 속에서 각 구성원은 상대를 자기 자신만큼이나 가깝게 느끼게 되며, 결국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남보다 위대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이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염원하였고 그토록 행복한 이 방전의 순간은 자체 내에 위험성을 안고 있다. 방전의 순간은 근본적으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평등감을 느끼지만 그들이 실제로 평등한 것은 아닐 뿐더러 영원히 평등해질 수도 없다. 그들은 결국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침대에 누울 것이며, 각자의 소유물을 지니며, 자신의 이름을 결코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딸려 있는 권속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가족을 이탈하지 않는다.”

_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Mass und ma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