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사르트르와 굉장히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한국전쟁, 6.25전쟁 말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이 결별을 하게 됩니다. 지성사에서 유명한 결별입니다.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을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 세계 좌익의 국제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했지만, 메를로퐁티는 북한의 남침에 완전히 쇼크를 받았거든요. 메를로퐁티는 공산주의 국가가 침략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걸 상상할 수 없었고, 북한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침략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에 충격 받았습니다. 둘이 한국전쟁의 성격을 놓고 아옹다옹하다가 결별의 편지들이 오가게 됩니다.

_ 고종석, 고종석의 문장2, 알마, 2014, 315쪽.

당시에 프랑스에 누보로망nouveau roman, 우리말로 하면 ‘새로운 소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장르가 점점 치고 올라오고 있었어요. 이 누보로망이라는 게 리얼리즘과는 거의 관계없고, 세부묘사에 집착하고, 굉장히 반反정치적이고 그렇거든요. 사르트르는 소설을 비롯한 산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보로망이란 게 나오니까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누보로망 작가를 직접 비판하기는 뭣하니까 자기 작품을 예로 들면서 말했어요. “내 소설 <구토>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 하나도 구해낼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사르트르가 누보로망 작가들한테 돌려서 얘기한 겁니다. ‘너희들 소설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무력한 것이다’라고. 누보로망을 지지하는 평론가들 가운데 장 리카르두Jean Ricardou라는 사람이 거기에 반박을 했습니다. “그렇다. 사르트르의 <구토> 자체는 굶어 죽는 아이 하나도 구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구토>는 어떤 한 아이가 이 세상, 이 지구의 어느 한 곳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 자체는 그 아이에게 어떤 식량도 줄 수 없지만, 문학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사르트르의 말도 옳고 리카르두의 말도 옳습니다. 분명히 사르트르의 말대로 문학의 직접적 유용성이라는 건 없을 겁니다. 그러나 리카르두의 말대로 만약 문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정말 우리는 짐승이 될지도 모르죠. 어느 지방에서 독거노인이 죽는다거나 기러기아빠가 자살한다거나 이런 사건이 그냥 신문의 사회면 기사로 나오면 훅훅 지나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학은 그것을 추문, 스캔들로 만들고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문학은 직접적 유용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_ 고종석, 고종석의 문장2, 알마, 2014, 448~4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