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론: 법과 사회 정의의 토대를 찾아서>의 지은이 로널드 드워킨(1931~2013)은 전세계 법철학 연구자들의 자부심이다. 개념 분석에 골몰하거나 현실로부터 유리된 추상적인 주제를 탐구하던 법철학을 생생한 현실의 장으로 끌어들여 법철학을 현실과의 대화로, 현실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려는 실천적 학문으로 바꾼 최고의 법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식인인 그의 논문과 저서는 항상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현대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수준을 드높였다.

인간 존엄성, 정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 평등, 권리, 법 등과 같은 … 개념들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실천에서 얻어진 경험, 직관이나 상식, 종교·윤리·정치적 가치관, 미리 획득한 여러 가치들이 투입되기 마련이다. 이것들 없이는 개념들은 풀이되지 않는다. 이 점이 드워킨이 ‘해석적 개념’이란 용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러 견해들 중에서 그리고 상충하는 가치판단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를 또는 가장 나은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각각의 견해와 가치판단에 투입된 여러 요소 하나하나가 숙고를 거쳐 확립된 최선의 것이면서도 서로서로 잘 통합되어 맞물려 있는가이다.

개정 이전의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시민을 강간한 자는 기존 형법상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었을까? 우리 법원은 일관되게 강간죄가 아니라 형법 제298조의 강제추행죄(“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로 처벌해 왔다. 피해자가 ‘부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녀’(여성)라는 형법상 개념은 한국 사회 보통 사람들의 관념과 생물학적 성염색체 기준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일관된 입장이었는데, 강간죄로 처벌한 2009년의 부산지방법원 판결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대법원의 입장도 바뀌었다. “국가의 임무는 삶의 제 분야에 있어서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과 행복의 추구를 돕고자 하는 헌법 원리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 모든 국민들이 가진 행복추구권과 사생활 보호,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근거한 헌법 또는 법의 근본원리에 바탕을 두어 (…) 본 법원은 종래의 이론과 선례를 근거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한 다음, 성적 소수자인 피해자의 법률상 지위를 여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부산지방법원 판결의 요지이다. 이 판결의 영향으로 강간죄 규정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로 2012년 12월 18일 개정되었다.

이 과정은 드워킨의 ‘통합성으로서의 법’(law as integrity) 사상을 잘 보여준다. 통합성으로서 법을 파악하는 입장이란 “과거의 공적인 결정(입법과 판례)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만을 법이라고 보지 말고, 그 결정들에 대하여 최선의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내용들을 법으로 보는” 것이다. 성전환자의 지위와 관련된 결정을 최선의 정치적·법적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인 위 판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엇이 법인지를 파악할 때 투입하는 여러 원리들을 정돈하고 배열하는 최고의 가치는 ‘동등한 존중과 배려’의 이념이다. 이는 개인의 책임, 시민의 정치적 책임, 국가의 정당성, 정의, 평등, 자유, 민주주의 개념과 이념을 이해할 때에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윤리학, 도덕철학, 정치철학, 법철학의 중심 개념과 원리 하나하나를 해명하면서도 상호 연관성을 갖게끔 조정하여 ‘잘 사는 삶’의 문제와 ‘정의로운 사회’의 문제를 통합한 이 저서의 원제는 ‘고슴도치들을 위한 정의론’이다.

_ 김도균,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l 한겨레, 2015/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