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전국시대는 격동하는 역사의 전환기”였으며, “전 중국의 통일과 평화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시대정신이 간절히 필요하였다.” “당시의 지식인 집단인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처한 입장에 따라 시대를 달리 진단하였다. 진단한 내용이 달랐으므로 당연히 처방의 내용도 달랐다.” “하나의 독특한 계층을 형성”한 지식인들은 “어느 특정한 계급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급에 복무하는가에 따라 계급 속성이 결정되었다.”

1. 맹자는 “토지를 생산자에게 고르게 분배하고 벼슬하는 자의 봉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한다. 이는 “민생을 위한 일정한 생업의 확보 -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 - 이자 맹자의 사(士)로서의 현실적 자기확보”이기도 하다. … 즉 “군주에게 등용되어 그를 보좌하고 민에게는 도덕을 교육하여 물질적 재화를 공급”받는 맹자의 처지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계급의식의 소산만은 아니다. 계급모순을 기초로 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반영”인 것이다.

2. 장자의 사상은 “구질서에서 신질서로 개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외된 일군의 몰락귀족, 소사유 농민 등 일종의 자유민 계층의 현실관이 반영”된 것이다. … “소생산자 계층의 첨예한 비판의식은 그들이 지니는 계급적 기반과 역량으로는 현실을 개혁할 수 없었다는 한계성 때문에 결국 현실에는 소극적이면서도 개인의 정신적 자유에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3. 묵가는 “소외대중의 입장에서 정치참여 기회의 균등과 경제적 이익의 균분을 주장하였다.” 한편 순자는 “당시 강화되어가던 군주의 권력, 중국의 통일 전망이라는 현실을 반영해서 예를 실천하는 군주를 통해 민생의 안정과 계층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안정된 사회의 질서를 바랐지만 … 역사적으로 결국은 억압의 구도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