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의 에세이를 아끼는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통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통찰은 “소설만이 발견하고 말할 수 있는 것”(101쪽)에 대한 깐깐한 사색으로 이어지고, 이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왜 진짜 소설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노련한 변호가 된다. 그 변호의 방법론은 “나름의 사적인 소설사”(92쪽) 만들기이다. 그의 에세이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면 우리는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라는 위대한 선구자에서 시작해 18세기의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과 19세기의 플로베르 등을 거쳐 20세기 초의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 등을 지나 20세기 중반 폴란드의 곰브로비치를 찍고 밀란 쿤데라 자신에 이르는 하나의 소설사를 얻게 된다(모든 위대한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인가?

그에 따르면 ‘진짜’ 소설가는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날 때 탄생한다.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는 시기, 자신의 고유한 영혼에 대해 말하려는 욕망에 들려 있는 시기가 바로 “서정적 시기”다. “반(反)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124쪽) 개종 이후 숙고해야 할 것은 “나는 항상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고자 했다”(86쪽)라는 플로베르의 말이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곧 비도덕적이다.”(87쪽) 뒤집어 말하면,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임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의 모더니즘과 더불어 소설은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선 사실로서의 역사로부터 독립했다. 소설가가 관심을 갖는 역사는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실존의) 뜻밖의 가능성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97쪽)일 뿐이다. 문제는 역사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실존의 수수께끼이므로, 필요하다면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적 개연성도 포기해야 한다. 예컨대 카프카가 그랬다. “카프카가 경계를 뛰어넘은 이후로 비개연성의 국경은 경찰도 세관도 없이 영원히 열려 있다.”(102쪽)

그 실존의 수수께끼를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헤르만 브로흐와 로베르트 무질의 “생각하는 소설”(98쪽)이 그 대답이 된다. 그들은 과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색을 소설 속에 통합하는 것, 그리고 아름답고 음악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작품의 필수 요소로 만드는”(99쪽) 작업을 해냈다. 이 여담(餘談, digression)의 글쓰기를 통해 소설은 ‘소금장수 이야기’를 넘어서고, 결코 영화가 병합할 수 없는 소설만의 고유한 영토를 얻는다(그 자신 분개하며 말한 대로, <프라하의 봄>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전혀 별개의 두 예술이다). 바로 이것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가장 매혹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가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21쪽)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선(先)해석의 커튼”(127쪽)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_ 신형철, 시사인 2008/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