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 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에 걸쳐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stahlhartes Gehäuse)로 만들어 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 ― 영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 사라져 버렸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을 웃으면서 상속한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마침내 빛이 바래 가고 있는 듯하며, 또한 ‘직업 의무(Berufspflicht)’ 사상도 옛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 ‘직업 수행(Berufs-erfüllungpflicht)’이 최고의 정신적 문화 가치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질 수 없는 경우 ― 혹은 역으로 말하자면 직업 수행을 심지어 주관적으로도 단순히 경제적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 ― 현대인들은 대개 직업 수행이 지니는 의미의 해석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 종교적 · 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영리 추구 행위는 그것이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미국에서 오늘날, 드물지 않게 그것에 직접적으로 스포츠적 특성을 각인하는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에 누가 저 쇠우리 안에서 살게 될는지,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발전 과정의 끝자락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들이 등장하게 될는지 혹은 옛 사상과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게 될는지, 아니면 — 둘 다 아니라면 — 일종의 발작적인 자기 중시로 치장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될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에게는 물론 다음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365~367)
* 자발적 금욕에서 금욕의 강압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외투는 쇠우리로 변질된다. 여기가 마르크스를 소환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