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김윤식이 문예지에 발표되는 모든 중단편 소설들을 읽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60년대 초반 문단에 나온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현장비평에 대한 김윤식의 이러한 열정은 동시대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일이다. 아마 이후로도 그러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소설가 박완서의 정확한 지적이 있다.”
“김정호가 순전히 발로 뛰고 눈으로 더듬어 최초의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었듯이 그도 발로 뛰고 눈으로 더듬어 그와 동시대의 우리 문학의 지도를 만들었다. 훗날 후학들이 그가 그린 지도 위에 그가 미처 못 본 아름다운 섬을 추가할 수도, 산맥의 높이가 틀렸다고 정정할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도 이 최초의 지도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업적을 전적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읽은 것보다 더 많이, 최소한 그가 읽은 것만큼은 읽어야 한다. 누가 그렇게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읽을 수가 있다고 해도 그가 한 것처럼 따끈따끈할 때 읽으면서 동시대의 증후까지를 읽어내는 일은 미래의 시간 속에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박완서)
“아직도 월평을 쓰고 있는가. 딱하고도 민망하게 살펴보았소. 이쯤 되면 나만의 방도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소. ‘작품과 작가의 구별 원칙’이 그것이오. 이 작가는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골짜기의 물을 마셨는가를 문제 삼지 않기. 있는 것은 오직 작품뿐. 이 속에서 나는 시대의 ‘감수성’을 얻고자 했고, 또 하고 있는 중이외다. 내 ‘자기의식’의 싹이 배양되는 곳. 어째서 그대는 세상 속으로 나와, 작가.현실.역사와 대면하지 않는가.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하면 어떠할까. 그러나 작품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현실의 그것보다 한층 순수하다는 믿음은 갖고 있소이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면, 그 ‘순수성’이란 이런 것이오. 밤이면 모두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담요에 싸여 잠들지만, 따지고 보면 원시 시대의 인간들이 그러했듯 들판에서 땅에 머리를 처박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가까스로 잠이 든 형국이라고.”(김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