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론의 핵심 아이디어가 힘센 새 친구를 얻기 위해 그 자가 싫어하는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신당 추진파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해소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신들이 그 거룩한 명분의 실현을 위해 고른 길은, 얄궂게도, 영남패권주의에 사실상 굴복하고 영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하거나 북돋우거나 지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1야당의 지지부진함과 내분의 뿌리가 바로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분당 뒤에 뭘 크게 잘못했다기보다 분당 자체가 문제였던 겁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호남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가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여당과 제1야당의 주류가 모두 영남패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광주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대결하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2003년 민주당 분당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호남정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분당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호남 유권자들을 친노 영남패권주의 세력의 인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남 유권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도한 그 분당 때문에, 호남 유권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해야 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친노가 주류인 새정치연합에 몰표를 주지만, 새정치연합 주류는 영남패권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입니다.
_ 고종석, 천정배 의원께(경향, 201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