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모든 일이 당신의 결심 하나에 달려 있다면 말이야. 즉 어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 루쥔이 살아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계속해야 할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죽어야 할지와 같은 문제들이 당신의 결단 하나에 달려 있다면 말이야. 그럼 어떤 결론을 내릴 건가? 그들 중 누가 죽어야 하지? 나는 그걸 묻고 싶은 거야.” “당신은 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지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내게 주었나요?” 소냐와 라스콜니코프는 동일한 대상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
소냐를 말함에 있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중요한 ‘우밀레니예(umilenie)’라는 감정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처음부터 ‘우밀레니예’를 강조했다. ‘우밀레니예’는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할 길은 없지만 대략 ‘겸손’, ‘온유’, ‘부드러움’, ‘연민’, ‘자비’, ‘순명’ 등의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개종 초기의 러시아 공후들은 명예나 자부심 같은 가치보다는 겸손과 순명을 훨씬 높은 덕으로 간주하였다. 우밀레니예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낮춤을 의미하는 ‘케노시스(kenosis)’와 결합하여 지극히 러시아적인 영성의 장구한 전통으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