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예견하지 못했던 프랑스인들은 정치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략) 무엇 때문에 ‘사회계약론’같이 어렵고 당찮아 보이는 추상적인 생각들과 씨름하며 괴로워하겠는가?”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을 살필 때 한 가지 봉착하는 문제는 ‘혁명의 성서’로 간주되는 ‘사회계약론’이 당대 독자들로부터 외면받았다는 사실이다. 미시사 전문가인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에서 합리적 이성이 아닌 ‘메스머주의’란 사이비 과학이 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고 주장한다.
메스머주의란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 출신인 안톤 메스머가 주창한 것으로, 18세기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모든 물체의 주변에 ‘메스머 유체流體’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을 매개로 중력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이 유체를 치료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온갖 질병을 치료하고, 멀리 있는 사람과 교신하며, 심지어 죽은 개마저 되살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면 등을 유도해 “시력 상실부터 지나친 우울로 인한 권태에 이르기까지” 치료술을 행했는데, 이 ‘멋진 공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단턴이 주목하는 이는 프랑스혁명(1789년) 이전 1778년 2월 파리에 도착한 독일 의학자 안톤 메스머다. 전 우주에 가득 차 있으나 “포착하기 어려운 어떤 유체를 발견”했고 이 유체로 “우주 전체를 목욕시키는 한편, 유체를 지구로 끌어내려 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몸 속 유체 흐름을 마사지 등의 방법으로 잘 흐르게 도와주면 온 몸이 조화를 되찾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동물마다 자기 몸에 어떤 자기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동물자기이론’, 혹은 메스머의 이름을 따 ‘메스머주의’라고도 부른다. 실제 통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몸이 불편한 이들을 넣은 뒤 메스머 유체 치료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메스머 유체 치료를 한답시고 귀족 여부인을 통에다 집어넣고 이리저리 주물러대기 일쑤였다.
단턴이 예의주시하는 바는, 파리 시민들이,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혁명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라파예트, 브리소, 베르가스, 카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이 메스머주의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아니 도대체 왜? 당대의 과학적 열기가 이유다. 중력, 전기, 열기구 등 과학 발달이 급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상황에서 “대중들은 미스터리, 스캔들, 메스머주의 같은 것에 열광”했다. ‘유체’라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과학 발달에 따라 점차 발견될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실제 당대 프랑스에서는 세느강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신발을 발명했다는 기사가 언론에 실리기도 하는 등 온통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넘쳐흘렀다.
사회불만세력은 메스머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타락한 귀족들은 유체의 균형을 잃었고 농민들은 건강한 자연의 유체를 고스란히 간직한 존재들이라 얘기했다. 그 때문에 이 세상의 유체가 건강하지 못하다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엔 마른 침을 삼키고 입술을 들썩대다 차마 말하지 못하겠지만, 몇 번 이런 주장과 선동들이 나돌다 보면 결국 모두의 입에서 ‘혁명’이란 단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메스머주의는 구체제를 비판하는 역할을 했다. 메스머주의는 주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박해받는 ‘순교자’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를 지지하는 대중들은 메스머주의의 타당성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되레 구체제 엘리트를 비판했다.
메스머주의는 또 루소주의를 흡수해 혁명사상 보급에 기여했다. 메스머의 후계자인 베르가스는 귀족들이 어리석은 관습에 의해 유체와 연결이 끊기고, 신체적·도덕적 힘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대신 원시적 미덕을 지닌 평민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해 루소와 비슷한 맥락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단턴은 “베르가스가 메스머의 이름으로 공표한 소명, 농민과 시골 신부들의 미덕을 동원하라는 소명에는 희미하게나마 민주적인 경향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