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상담심리학에 매몰된 기독교. 노인이 청년에게 여과되지 않은 충고를 하자 [정황의 일부를 전해들은] 중년이 그 노인을 사이코라 폄훼하였다. 둘 중 무엇이 더 큰 과오인가.

충분히 섬겨야 라포르가 생성되는데 “라포르가 없으면 말하지 말라.” 저들이 공유하는 상담심리의 기본 전제이다. 동의하는 바이나, 이 원칙을 성서 위에 두면 교회의 질서는 무너진다.

위 맥락에서 라포르는 Give & Take에 근간한다. ‘나는 수차례 섬긴 공로가 있으니 말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식이다. 무익한 종도 일정한 수고를 하면 훈육의 권세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오류다. 성서는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가르쳐 지키게 하는 [권세 아닌] 사명을 얻는다 하는가.

첫 번째 오류가 일부 관계에 국한된다면, 두 번째 오류는 라포르가 미약한 나머지 모든 범주에서 발생한다. 실상 두 번째 오류는 파국이다.

라포르가 미미한 상태에서 옳음을 전해도 그것이 불쾌할 경우, 그 누구도 “지가 뭔데’라는 원색적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라포르가 없다면 성서도 통용되지 않는다. 예컨대 바울 서신의 권고 역시 극심한 반감에 배척된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가. 어느 한 사람에게만 훈육의 권세가 초기값으로 주어져 있고, 그 외는 공로를 통해 자격을 얻으라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두의 사태가 만연해졌다. 질서가 평평해졌으니, 노고를 쌓아야 권위를 얻는다.

누군가 반문할지 모른다. ‘마음이 열려야 진리도 들어가지 않냐’고. ‘라포르란 마음이 열린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고. 이 질문은 사안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문제는 라포르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밝혔듯이 수긍한다. 관건은 이른바 라포르의 원칙을 성서 위와 아래, 어느 곳에 두느냐에 있다.

성서는 살인하지 말라 하나, 동시에 살인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기도 한다. 양자 중 무엇이 우선인가. 전자라 하면, 다윗은 골리앗을 살해한 범죄자로 변질된다. 라포르의 원칙도 그렇다. 분명 여기에 유익이 있으나 우선순위가 뒤바뀌면 교회의 질서는 종언을 고한다.

라포르의 원칙을 교회의 질서 위에 두면 정념의 위협에 체포되어 타진요와 같은 병리적 예외나, 20대 총선의 정치권 표심에 견주어 교회를 관리하게 된다. 리처드 니버에 대한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일침이 그립다.

* 라포르([프랑스어] rapport) _ 두 사람 사이의 공감적인 인간관계 또는 그 친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