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는 “단독자와 윤리의 관계, 그리고 그 윤리를 넘어서, 정확하게는 윤리와 무관한 신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하느님 없이 직접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규정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실재’reality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규정을 투사한다.” 문명의 뒷면에는, “내적인 혼란과 부조화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절망”이 꼭 그만큼 쌓인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제는 올바른 방향을 지시해 줄 어떤 방향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이 확립한 실재는 “근본적으로 유한”하며, 그에 따라 “결국 붕괴”하며,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즉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요구에 부응하여 “실재의 체계화로 귀결” — 헤겔의 거대한 사변 형이상학의 체계가 이것의 극명한 사례일 것이다 —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키에르케고어의 대답은 간단하다. 너 자신, 즉 개인(단독자)이 되어라.”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신에 의한 의미부여를 거부함으로써만 가능한 자유였음을 깨닫는, 이 거부를 다시 거부하는 회심을 내면으로부터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재거부는 “탈구축De-Construction 운동”이요, “자아를 창조하는 방법 … 결단”은 “재구축Re-Construction 운동”이다. 이러한 이중의 운동을 통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고독해도 인간이 되느냐, 떠들썩하지만 푸성귀처럼 살아가느냐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공포와 전율>> 마지막 장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Akedah)을 분석한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놓여야 할 자리에 대신 세웠던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체계들을 폐기”하였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를 거친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윤리는 이제 신앙을 통해,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고 정지된다.” “아브라함은 맨 먼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고 그 이후에야 바로소 윤리 체계, 한때 매 순간 그를 지배했던 윤리 체계로 나아간다.”

신을 매개로 한 윤리 체계가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우리는 본회퍼에서 발견한다. “윤리 체계에 따르면 자신이 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살인임을 본회퍼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을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인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자신의 불안을 설명하면서도 하느님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구하신다는 자기 느낌에 대한 확신 또한 보여준다. 그는 그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았다. …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_ 강유원, 2016.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