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는 고등학교 재학 중 잭슨랩이 개최한 여름학교에서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명문 스와스모어 대학을 나와, 1964년 26세의 나이에 록펠러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다. “1965년, 나중에 함께 노벨상을 타게 될 레나토 둘베코(당시 51세)가 볼티모어를 캘리포니아의 썰크 연구소로 영입했고, 1968년에는 다음 해에 노벨상을 타게 될 MIT의 살바도르 루리아(당시 56세)가 그를 부교수로 데려갔다. 당대의 최고 과학자들이 20대 중반인 볼티모어의 능력을 일찌감치 인정한 것이다. MIT에 온지 불과 2년 후인 1970년, 그는 RSV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역전사 효소를 분리하며, 유전 정보는 DNA에서 RNA 방향으로만 전달된다고 했던 ‘센트럴 도그마’를 깬다. 그리고 발표 후 불과 5년 만에 37세의 나이로 노벨상을 받는다.”

“1990년 볼티모어는 록펠러 대학의 총장으로 영입되었다. 이 대학은 60년대까지는 세계 최고의 생명과학 연구기관이었으나, 보수와 권위에 뿌리를 둔 유럽식 대학문화로 인해 그 명성이 떨어져가던 때였다. 부임 후 그는 교수 관리에 개혁을 시작하며 특히 주니어 교수들의 지위를 크게 상승시키니, 기득권을 가진 교수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볼티모어는 MIT의 동료 교수였던 이마니쉬 카리의 논문에 공동저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데이터 조작 시비에 휘말려 있었는데, 일부 반(反)볼티모어 세력들이 이를 이용하여 총장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볼티모어는 1년 반 만에 총장직을 사임하고 1994년에 MIT의 석좌교수로 돌아갔다. 1996년 미국 정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는 정밀조사를 통해 그간 있었던 19개의 고발항목 모두가 근거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록펠러 대학은 2004년에 그 대학 최고의 영예로 알려져 있는 명예 과학박사(Doctor of Science) 학위를 볼티모어에게 주면서 용서를 구했다. ‘이마니쉬 카리 케이스’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문성이 없는 국회의원의 과도한 개입과 명성을 얻으려는 외부인의 감찰 행위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로서 많은 기사와 논문, 책이 나왔을 정도로 미국 과학계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