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010 LG아트센터 기획 공연: “레프 도진 연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바냐 아저씨>”

1. “인격의 3요소를 지, 정, 의라 한다면 과학(논문)은 知를 파악하고, 문학(희곡)은 知를 동원하여 情을 호소하며, 예술(연극)은 知와 情의 토대 위에 意를 추동한다. 인격의 도야를 유념한다면 진정한 교육은 연극에 이르러 완성된다.” 

2. 교육의 이상은 “경건을 향한 부단한 정진”이다. 여기서 경건은 개인적/사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본질(眞)과 당위(善)의 완전을 추구하는 예술(美)이다.

3. 근대 이후 진, 선, 미의 통합인 교육의 이상은 지식, 윤리, 기예로 분열된다. “인간의 욕망이나 의지 등에 의해서 지배되는 윤리적 가치 이외에 다른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욕망이나 의지에 기초를 두지 않은 새로운 가치이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적 가치이다.” 따라서 “예술적 가치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음란물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4. “새로운 군주의 덕은 타고난 것이 아니요, 내면의 품성을 수양함으로써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해서 역량을 보여야 한다. 그 역량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보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기 충족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외양과 결과이다. … ‘보통 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의해 감명을 받기 때문’이다. 외양과 결과, 이는 사물의 본질과 당위를 따져 물을 때는 제시될 수 없는 항목이다. 이것이 바로 ‘실효적 진리’(verità effettuale)의 내용이다. 실효적 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군주. 그는 경멸과 미움을 받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을 <군주론>에서 아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물론 새로운 군주는 이러한 소극적 차원을 넘어 무자비해야만 한다. 그는 ‘살아 숨쉬는 정신’(animo)를 가진 군주는 고대의 덕의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 근대의 정치는 이로써 관조에 의한 지혜의 차원을 폐기한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는 이로써 새로운 자들이 된다.” _ 근대에 이르러 지식이 폄하한 정보는 진리가 되었다. 실존주의 사상이 표방한 문제해결식 학습은 마키아벨리식 덕목의 오마주였다. “군주는 필요에 직면해서 역량을 보여야 한다.”

5. 사상은 [근원적으로 사태를 탐구하는 방법론인]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정합적으로 세상을 규정하는 세계관으로서, 백가쟁명의 소산이다.

6. Post-modernism이라 불리는 “초점 없는 혼합주의”는 1)거대담론의 망실, 2)축적체제의 변형, 3)평생학습의 대두에 의해 형성되었다. 황지우 시인이 포착한 大腦에서 性器로의 전환은 주체성과 자율성의 기치를 고양하였으나 - 하루키와 같은 - 상품화된 대안의 구입은 ‘다양한 획일’ 내지 ‘모래알의 시멘트화’를 양산하였고, 이러한 전체주의로부터의 탈선은 환상으로의 도피로 귀착한다.

7. 1968 프랑스 혁명, 1969 일본 전공투, 그리고 1992 한국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8. 강의의 핵심은 텍스트 전달에 있지 않다. 그것의 관건은 텍스트를 학생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이다. - 나는 이것을 Lev Dodin에게서 배웠다. “만약 어떤 연극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관객이 그 연극에서 자신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 서정성에 사회성을(상상력에 권력을) 담는 것, 어쩌면 이것이 실존주의 사상의 태생적 기질이자 형식적 기여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생동하는 실재, 그리고 그러한 실재가 충분히 파악된 감정 상태와 관련되기 때문에, … 사실상 문학에 가깝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지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감정 상태를 전달하고자 개성적이고 문학적인 방식으로 집필하고, 또한 각자 자기 나름의 매우 책임있는 산문체를 사용하였다.”(Kneller, 1971[1990]: 97~98).

9. 본질과 당위가 아닌 외양과 결과. Sosein의 파악이 아닌 Dasein의 변혁. 이론에서 실천으로. 도덕이 아닌 윤리의 시대, 실존이 본질에 앞서다.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먼저 인간은 존재하고, 출생하고, 현장에 나타나고, 그리고 오직 그 이후에만 그 자신을 분명히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자의 견해처럼 인간이 불확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확정한 이후에만 어떤 존재로 될 것이며, 미래의 그의 모습은 그 자신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 인간은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상상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의 상상이 바로 실존에로 추진된 후에 형성될 그 자신의 모습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형성한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Sartre, 1947: 18)

10. “1989년 이후 나는 변했다. 그때까지 나는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 비판은 그들이 계속해서 강고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들이 존속하는 한 단지 그것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를 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이 붕괴했을 때 나는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이 그들에게 의존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뭔가 적극적인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칸트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그때부터였다.”(18~19) “1990년까지 나는 적극적인 말이라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 후로 자본제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 또는 문화적 저항에 머무르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 하는 과정에서 칸트를 만났다. … 나는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이론을 제출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전의 책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이론을 제출할 때는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범위에 그친다면 아카데믹한 책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柄谷行人, 2001[20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