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역사의 모든 이념을 이야기라 하여 부정했습니다. 즉 이념은 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새로운 사고가 아닙니다. 애당초 칸트는 이념은 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감각에서 유래하는 가상과 다르다. 그런 거라면 이성이 정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성에서 생겨나는 이성 고유의 가상이 있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흄이 말한 것처럼, 동일한 ‘자기’ 따위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와 같은 가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가상은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합니다. 칸트는 이와 같은 가상을 특별히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념도 초월론적 가상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마찬가지 입니다.” “초월론적 가상(규제적 이념)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통합실조증이 됩니다. 선진국의 인텔리는 이념을 이야기(가상)라 하여 시니컬하게 비웃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로 다른 이념(가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역사는 아메리카의 승리에 의해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됨으로써 끝났다, 와 같은 난폭한 헤겔주의적 관념론이 등장합니다. 다른 한편, 노골적으로 종교적 원리주의가 등장합니다. 이념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전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념이 끝났다고 냉소하는 인텔리는 결국은 냉소당하거나 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나는 다시 한 번 이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고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칸트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 schizophrenia = 정신분열증 = 통합실조증 = 조현병(調絃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