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일본의 어느 활동가가 나에게 책 한 권을 권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환상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책이었다. 1968년 출간돼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책이다. 요시모토는 이 책에서 국가란 사회계약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말하는 부르주아지 계급을 위한 폭력장치도 아니며, 오직 공동의 관념이 만들어낸 창작이며 픽션이라는 내용을 펼친다. … 일본인 친구가 이 책을 왜 나에게 권했는지 그 속마음을 알 길은 없다. 짐작건대 <공동환상론>이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서로, 스탈린주의와 일본 공산당에 반대하는 1960년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학생 및 신좌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그는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읽고 있던 나를 교조주의자라 ‘착각’하고 이 책을 읽고 교조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호의 아닌 호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친절이 실패로 끝난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권한 책이 너무나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본어 실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도중에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문헌을 보니 이 책의 완독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한다니 온전히 내 지력 탓만은 아니다. 그때부터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나에게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권혁태)